#시작은 인수 하지만 갈등 생기면…
연매출 700억~800억 원을 기록하는 안정적인 자동차 부품업체 화진. 코스닥 상장사이기도 한 화진은 무자본 M&A 세력들의 놀이터로 전락해, 현재 상장폐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피인수부터 지금까지, 2년의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는데 그 과정을 찬찬히 살피면 어떻게 주가조작 세력이 M&A라는 명목으로 ‘장난’을 치는지 알 수 있다.
M&A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A 씨(50세). A 씨 일당은 상장사 인수를 통한 ‘한탕’을 계획하고 당시 매물로 나와 있던 화진을 선택한다. 지난 2017년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뒤 그해 7월 즈음 회사를 인수했다. 인수 금액은 583억 원. 하지만 A 씨 일당은 돈이 없었다. 600억 원에 가까운 돈은 저축은행 대출과 차입, 사채 등으로 충당했다.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관계자가 주식시황판을 보고 있다. 최준필 기자
주가 조작 세력들 사이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A 씨의 화진 인수 소식에 주가는 들썩였다. 인수 전 4000원이었던 주가는 1만 원까지 올랐다. 덕분에 A 씨에게 투자한 사채업자 등 투자자들은 거액을 벌었고 A 씨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인수한 화진의 회사 돈을 마음껏 주물렀다. 자금 대여 및 전환사채 매입 등의 방식으로 201억 원을 쓰는 등 414억 원을 유용했다.
회사 돈으로 인수한 여러 상장사의 주식을 거래해 거액을 손에 쥔 A 씨는 화진 주가가 내려가면서 저축은행에 담보로 제공한 주식 280억 원 어치가 처분될 위기에 처하자, 수소차 관련 신제품을 출시한다는 허위 보도 자료를 통해 ‘수소차 테마주’에 이름을 올리려는 시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미 주가 조작 혐의 등으로 5번 기소됐던 A 씨는 함께 ‘한탕’ 했던 일당에게 책임을 다 뒤집어씌우고 중국으로 밀항하려다가 해경에 체포돼 결국 구속 기소되는 처지가 됐다.
덜미가 잡힌 화진 사건은 사실 강남 주가 조작 큰손들 사이에서는 “오래된 방식이다. 운영이 거칠었다”는 평이 나온다. 너무 ‘오래된 방식’으로 잡음이 많았다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주가 조작 세력은 “화진을 언론에서는 무자본 M&A라고만 조명하지만, 사실 초기 투자자들을 모을 때는 전환사채로 일정 수익 이상을 보장하는 방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며 “인수에서부터 주가 조작, 그리고 출구 전략까지 일정한 계획을 짜고 그 틀 안에서만 움직여야 하는데 A 씨가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갈등이 발생했고 결국 그로 인해 구속까지 된 것 아니겠냐”고 평가했다. 실제 사건을 잘 아는 법조인 등에 따르면 A 씨는 다른 일당에게 주포(주가 조작을 설계하는 사람) 책임을 떠넘기는 시도를 한 탓에 A 씨와 틀어진 일부 세력들이 사건 전말을 수사기관에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도 보여주지 않은 매력적인 꿈 제시해야”
그렇다면 시장에는 얼마나 많은 주가 조작 세력이 있을까. 주가 조작 세력들의 얘기를 취합하면 현재 강남에는 크게 10팀 정도가 존재한다. I 사, J 사 등 이미 10배 이상 주가가 오른 종목들이 이들의 사냥감이었는데, 이들의 패턴은 앞서 언급한 화진 케이스와 유사하다.
새로운 회사를 인수한 뒤 제3자 유상증자나 운영자금 확보, 타법인 지분 취득 목적의 전환사채 발행 등으로 100억~200억 원의 자금을 마련한다. 그리고 바이오 등 새로운 사업으로의 진출 및 지분 인수를 발표한 뒤, 이를 통해 주가가 오르면 전환사채(CB) 등 미리 확보한 주식 물량을 시장에 털어내는 방식으로 수익을 실현한다. 최소 두 세력 이상이 두 개 이상의 회사를 동원해서 자금줄이 되어주는데 주가를 끌어 올리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최근 시장을 시끄럽게 했던 S 사는 지난 6월 주가가 급등했는데, 급등 과정에는 아무런 호재도 없었다. 1달 사이 8~9배 가까이 주가가 오른 S 사. 그 사이 S 사 주가를 띄운 세력들은 주식 담보 대출 형식을 통한 반대매매로 지분 정리를 시도했다. 업계에서는 못해도 500억 원은 벌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 정도다.
하지만 이런 S 사 방식마저도 너무 ‘올드하다’는 게 최근 트렌드에 밝은 주가조작 세력 주포 B 씨의 설명이다. “수급(돈)으로만 주가를 올리면 특정 계좌 몇 개의 움직임이 금융감독원은 물론, 검찰 수사에서 다 털릴 수밖에 없다”는 것. 심지어 그는 “조금이라도 허위 내용을 담아 공시를 하거나, 인위적으로 호가 창에 1주 거래를 통해 HTS나 MTS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은 꼬리가 길어 잡힐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다. 과거에는 일부러 홍콩 등 해외로 나가 ‘외국인’ 자금인 것처럼 시장을 속이기도 했지만, 이제 그런 투자 방식은 널리 쓰이지는 않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그는 1~2년 전만 해도 ‘바이오’ 사업 진출만으로도 주가가 올랐는데 이제 그것도 끝났다고 단언했다. 그는 “시장이 똑똑해져서 어설픈 꿈을 제시하면 개미 투자자들이 달라붙지 않는다”며 “시장 투자자들이 달라붙게 하려면 아무도 보여주지 않았던 꿈을 보여줘야 하고 사업 아이템을 더 구체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영화 ‘돈’ 스틸컷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무관하다.
#“20억 원이면 충분히 회사 인수”
검찰 수사를 받으면 기업 사냥꾼이라고, 돈을 잘 벌 때는 M&A 전문가라고 불리는 주가 조작 세력의 주포들. 그렇다면 주포들은 어떻게 움직일까.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 수십억 원 이상을 확보한 주포들은 20억~30억 원을 투자할 수 있는 사채업자나 투자업계 큰손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정보를 공유한다. 시장에 매물로 나오는 시가총액 400억~500억 원 상당의 회사들이 타깃이다.
한 주가조작 세력 주포 C 씨는 “괜찮은 매물이 나오면 나 혼자서 500억 원 정도는 끌어 모을 수 있다, 주포가 한 100명 정도 있고 크게 나누면 10세력 정도 있는 것 같다”면서 “나를 믿고 투자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 주가가 낮으면서 대출을 추가로 100억~200억 원 정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회사 재무 구조가 단단하면 좋은 인수 대상이 된다. 20억 원만 있으면 인수 가능하다”고 귀띔했다.
현재 시장에는 G 사, I 사 등이 매물로 나와 있는데, 하루에도 두세 곳의 세력들로부터 “함께 한번 해보자”는 인수 제안을 받는다는 C 씨. 하지만 그는 최근 이 시장의 분위기를 ‘우려스럽다’고 평가했다. 건설업 경기가 악화되면서 지방을 중심으로 ‘반달(건달이었다가 사업가로 변신한 경우)’들이 대거 주가 조작 시장에 들어왔다는 것.
그는 “최근 1~2년 사이 1000원 미만 종목들이 1만 원 넘게 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며 “얘기를 들어보면 그냥 묻지마 투자로 주가를 급 끌어올려 개미들을 유혹하는 방식이더라. 세력들이 늘어나면서 시장이 더 혼탁해졌다”고 평가했다.
실제 B 씨와 C 씨가 ‘다른 세력이 움직이고 있다고 들었다’고 한 S 사, P 사, J 사, U 사, M 사 등은 최근 며칠 동안 10% 넘게 상승하거나 하락하는 모습을 수차례 연출했는데, 종목 토론방이나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모여 있는 소액 주주들은 등락 이유를 정확히 짚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막연한 기대감에 들어왔다가 속칭 ‘물려서’ 하소연을 하는 소액 주주들이 대다수였다. 한 투자자는 “전세 담보 대출로 1억 가까이를 투자했다가 10분의 1 토막 났다”고 토로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포들이 ‘처분’하고 나가서 형성되는 본격적인 하락장의 피해자는 결국 개미 투자자들인데, 법조계는 “주가 조작은 수사가 어렵고 처벌이 약한 게 진짜 문제”라고 지적한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화진 사건도 주가 조작 혐의보다는 횡령, 배임을 주로 붙이고 주가 조작은 허위 공시 등만 문제 삼아 자본시장법으로 기소하지 않았냐”며 “주가 조작은 입증도 어렵고, 경영 판단과 주가 조작 목적을 구분 짓기 힘들다”고 얘기했다.
최근 주가 조작에 관여한 사실이 드러난 배우 이태임 씨의 남편 오 아무개 씨는 대가로 받은 수억 원의 수표를 제3자를 통해 현금화했을 정도로 치밀하게 움직였음에도 1심에서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주가 조작 초범인 경우 실형이 드물다는 게 법조계 평이다. 주가 조작 수사 경험이 있는 검찰 관계자는 “금감원과 검찰 등이 예의주시한다고 하더라도 세력들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해 서로 고소·고발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점점 치밀해지는 주가 조작 방식을 수사가 따라가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고 잘라 말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