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 연립여당을 구성했지만 개헌 발의선 의석 확보에는 실패한 아베 신조 총리. 연합뉴스
당초 아베 정부가 참의원 선거 이후 규제 계획을 차츰 철회하지 않겠느냐는 분석이 우세했다. 일본이 수출규제에 대해 납득할 만한 증거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장기전으로 가면 일본 경제에도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분간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가 이번 참의원 선거 결과와 무관할 것으로 관측된다. 앞서 아베 총리는 선거 결과가 나온 뒤 아사히TV와 인터뷰에서 “한국 측의 대응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위반한 것”이라며 “한국이 제대로 된 답변을 가져오지 않으면 건설적 논의가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수출규제 강화에 대해선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적인 조치가 아니라 안보와 관련된 무역 관리를 위한 것”이라고 언급하며 이번 사태 장기화를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박소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참의원 선거가 끝났음에도 일본은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며 “아베 총리는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내부 결속 및 레임덕 방지를 위해 한국에 대한 공세를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실제 일본 정부는 이르면 8월 2일 열리는 각의(국무회의)에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우대국)’ 대상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처리하려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개정안이 예정대로 각의를 통과하면 시행 시점은 오는 8월 말로 전망된다.
일본 수출규제는 지난 2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일반이사회에서 의제로 다뤄졌다. 이 자리에서 한국 정부 대표단의 김승호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은 이례적으로 분쟁 상대국인 일본에 공식적인 1 대 1 대화를 제안했다. 하지만 일본 대표단은 ‘수출규제는 국가안보를 위한 조치이고, WTO에서 거론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안건’이라는 기존 주장만 되풀이할 뿐, 대화 거부로 일관했다.
결국 변수는 국제 사회, 특히 미국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일본이 한국의 주축 산업 중 하나인 반도체산업을 주 타깃으로 견제하고 있지만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국제 사회에서 차지하는 영향이 상당한 만큼 사태가 장기화되면 글로벌 공급망에 악영향을 끼쳐 비난의 화살이 일본을 향할 가능성이 크다. 박소연 연구원은 “이번 규제 품목을 봐도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가장 중요한 불화아르곤과 불화크립톤 포토레지스트는 포함하지 않았다”며 “규제 여파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로 퍼지는 것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지난 23일에는 반도체산업협회(SIA),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 등 미국 전자업계 대표 6개 단체들이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와 관련해 우려와 함께 조속한 타결을 촉구하는 서한을 한·일 양국 정부에 공동 발송하기도 했다. 이들은 일본의 이번 규제에 대해 ‘불투명하고 일방적인 조치’라고 지적하며 글로벌 산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강한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미국이 중재에 나설지는 아직 미지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나에게 관여해달라 요청했다. 한·일 정상이 둘 다 원하면 관여할 것”이라며 조건부 참여 가능성을 처음 내비쳤다. 이후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만 일본과 한국에 방문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한편 한국 정부는 현재 일본에 대해 WTO 제소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WTO 제소를 통한 분쟁해결은 보통 2~3년이 걸리는 만큼 정부는 규제 장기화에 대한 대책 마련에도 나서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면 반도체 외에 다른 산업의 공급망 혼란도 초래할 수 있다. 대기업들이 자신들의 사업 진행 과정에서 일본산 품목이 뭐가 있는지 전반적인 점검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정부에서도 제3국을 통한 공급망 다변화와 함께 장기적인 투자를 통한 국산화 시도를 하고 있다. 박 연구원은 “정부의 추가적인 지원에 따라 국내 소재 기업들은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삼성전자·SK하이닉스 일본 방문 성과는? ‘정말 빈손으로 돌아왔나’ 일본이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반도체 관련 필수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조치를 내리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은 비상이 걸렸다. 이에 경영진이 해결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으로 날아갔다. 이석희 SK하이닉스 대표이사는 지난 21일 김포 국제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해 23일 귀국했다. 김동섭 SK하이닉스 대외협력총괄 사장도 지난 16~18일 일본을 방문했다. SK하이닉스 경영진은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할 경우 소재 수급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일본 현지 협력사들을 만나 의견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앞장서 규제를 하고 있는 만큼 협력사들과 협의가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본의 수출무역 규제 발표에 따라 일본 출장을 마치고 김포국제공항으로 입국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연합뉴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은 공개적으로는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기업 총수는 사전 조율이 없이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 이번 이재용 부회장의 일본 출국도 일본 협력사들과 미리 어느 정도 대화가 있었을 것”이라며 “실제 일본 회사들과 사태 해결 진전 등을 담은 발표 및 사진촬영 등이 준비됐던 걸로 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일본 협력사들이 일본 정부 압력에 결국 난색을 표해 이뤄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일정도 예정보다 길어지고 큰 소득 없이 돌아온 것 아니겠느냐”고 귀띔했다. 반면 업계에서는 상황이 예민한 만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언급을 조심하는 것이라고 관측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에칭가스 등의 재고나 수급 상황을 공개하는 게 도움이 안 된다. 이러한 내용을 공개하면 공급사나 고객사의 문의가 빗발치고 불안만 조장할 수 있다. 영업이나 구매에 제약도 생길 수 있다”며 “그러다보니 기업 입장에서는 성과가 있어도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민웅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