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앞)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뒤). 연합뉴스
지난 7월 1일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한국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며 첫 번째 대응 조치로 반도체 관련 필수 소재 3개 품목, 즉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와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대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2일 아베 총리 주재로 각의(국무회의)를 열고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우대국인 ‘화이트리스트’ 대상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의결·처리했다. 각의를 통과한 개정안은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이 서명하고, 아베 총리가 연서한 뒤 나루히토 일왕이 공포하는 절차를 거치고, 그 시점에서 21일 후 시행된다. 일본 경제산업상은 이번 조치가 오는 28일 시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는 미국과 영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아르헨티나, 호주, 뉴질랜드 등 27개국이 지정돼 있었다. 2004년 명단에 지정된 우리나라는 리스트에서 빠지는 첫 국가가 됐다.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 일본은 자의적으로 한국에 타격을 줄 수 있는 품목을 중심으로 한국에 대한 수출 절차를 대폭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두 번의 규제조치를 두고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경제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앞서 지난 1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정경분리 원칙을 훼손하는 일본의 부당한 결정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의 경제보복이 노골화된다면 경제 전면전 선포로 간주하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단호하게 대응할 것임을 분명하게 경고한다”고 밝혔다.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됐다고 해서 일본 물품을 아예 들여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도 이번 조치가 수출규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민간용으로 사용되는 정상 수출의 경우 허가해주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되면 무기로 전용될 우려가 있는 1100여 개 수출 물품은 포괄허가에서 개별허가 대상으로 바뀐다. 이들 품목을 한국으로 수출하려면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반도체처럼 우리나라 산업 내 비중이 높은 업종 중심으로 수출을 막거나 추가서류를 요구하는 등의 방식으로 허가를 지연하는 방법으로 우리나라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당장 지난 7월 반도체 관련 필수 소재 3개 품목의 수출규제 조치로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산업에 대한 비상이 걸렸다. 삼성전자의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해 SK하이닉스 이석희 대표이사 등 경영진들이 소재 수급 해결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날아가기도 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일 주요 산업의 경쟁력을 비교한 결과 방직용 섬유, 화학공업, 차량·항공기·선박 등의 대일 수입의존도는 90%가 넘는다. 특히 1100여 개 중 80여 개 품목은 일본 수입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나 석유화학제품, 공작기계 등이 대표적이다.
재계에서는 한국이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주력하는 전기차나 일본 의존도가 높은 화학, 정밀기계 등을 다음 타깃으로 보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와 수소전기차 탱크에 들어가는 필수 소재 부품 역시 상당수 일본산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삼성SDI, LG화학, SK이노베이션 등 배터리업체들도 대비책을 고심 중이다.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에 따른 우리나라 경제 여파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일부 기업은 소재부품 조달로 애로를 겪을 수도 있다”면서도 “하지만 현재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는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은 없을 것으로 본다. 우려하는 전망에 20~30% 수준에서 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주 실장은 이어 “이번 일본 수출규제는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것으로서 일본 정부에 3년에 한 번 받던 허가를 6개월 단위로 신청해야 하고, 제출서류도 늘어나며 심사 처리 기간도 최장 90일까지 늘어난다”며 “한국 기업들은 한꺼번에 수입을 많이 하는 방식으로 대비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번 일본의 조치는 아베 정부의 정치적 목적에 따른 것이라 경제적인 전망을 예상하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번 조치는 일본 경제에도 타격을 주는데, 그럼에도 강행한 것은 아베 정부의 정치적 의도 때문”이라며 “따라서 한·일 양국간에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며, 경제적 전망은 무의미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우리 정부는 현재 일본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WTO 제소를 통한 분쟁 해결은 보통 2~3년이 걸리는 만큼 정부는 규제 장기화에 대한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실제 정부는 일본의 백색국가 배제가 결의되기 전부터 단기·중장기 대책 마련에 속도를 내왔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제출한 서면질의 답변서를 통해 “화이트리스트 제외가 현실화하면 수출제한 대상이 확대될 우려가 있다”며 “추가 보복에 대해 발생 가능한 모든 경우를 염두에 두고 관계부처가 긴밀히 공조해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대상 제외 개정안 처리 직후인 2일 오후 2시 국무회의를 주재, “일본의 조치로 우리 경제는 엄중한 상황에서 어려움이 더해졌으나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며 “적잖은 어려움이 예상되나 우리 기업과 국민에게는 그 어려움을 극복할 역량이 있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또 “정부는 소재부품의 대체 수입처와 재고 물량 확보, 원천기술 도입, 국산화 기술 개발과 공장 신·증설, 금융지원 등 기업 피해 최소화에 할 수 있는 지원을 다하겠다”며 “소재·부품산업 경쟁력을 높여 기술 패권에 휘둘리지 않고 제조업 강국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로 삼겠다”고 강조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중국 사드 경제보복과 일본 수출규제 차이점은? 지난 2016년 한국 정부와 주한 미군이 경북 성주군에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를 발표하자, 중국 정부는 한국에 대해 경제보복에 나섰다. 일본의 대 한국 수출규제를 계기로 국내에서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여론이 퍼지고 있다. 서울 은평구의 한 식자재 마트에 걸려있는 일본 제품을 팔지 않는다는 안내문. 최준필 기자 이러한 중국의 경제보복으로 인해 한국이 입은 피해액은 2017년 한 해에만 8조 원이 넘은 것으로 추산됐다. 이에 경제계와 시민들은 사드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고 정치권에 요구했다. 3년 후 이번에는 일본이 반도체 관련 필수 소재 품목 수출규제 및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 등 2차례에 걸친 경제보복을 가해왔다. 이번에는 일본의 조치에 한국 국민들이 일본 불매운동에 나섰다. 일본으로 가는 여행을 취소하고, 아사히맥주와 유니클로 의류 등 일본제품에 대한 불매에 나섰다. 이러한 한국 국민들의 움직임에 일본 경제도 타격을 입히고 있다. 실제 지난 2일 일본 정부의 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의 이후 오히려 일본 니케이255 주가가 전일 대비 2.11% 하락해 2만 1087.16으로 장을 마감했다. 반면 한국의 코스피는 2000대가 무너지긴 했지만 전일 대비 0.95% 떨어지는 데 그쳤다. 반도체는 지난해 국내 전체 수출의 20%, 국내총생산(GDP)의 7.8%를 차지했다. 따라서 이번 일본 수출규제가 장기화된다면 한국 경제에 피해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한일 경제갈등에 대한 맞대응 지지가 사드 사태 당시보다 높을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2017년 중국의 사드 경제보복 당시에는 타격 분야가 주로 소비재·유통이었다. 이에 일반 국민들의 체감도가 컸다. 그래서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며 “반면 일본 수출규제는 반도체산업이 핵심이다. 그 규모나 비중은 사드 사태 때보다 크지만, 국민들이 직접 맞닿은 실물경제가 아니기 때문에 체감은 떨어진다. 이에 일본 불매운동은 동력을 얻어 오히려 오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소비패턴이 변화하고 익숙해지면 한국 경제의 체질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민웅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