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다시 일본에 지지 않는다”…여야, 아베 도발 규탄 한목소리
“LTE를 쓰던 사람에게 2G폰을 쥐어줘 봐라. 얼마나 답답하고 속이 터지겠느냐.” 화이트리스트 의미를 묻는 질문에 한 대학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화이트리스트에서 빠지게 되면 일본으로부터 물건을 들여오는 시간과 비용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다. 그나마 수입을 할 수라도 있으면 괜찮다. 품목에 따라 일본 정부가 얼마든지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 수입 자체가 힘들어지는 상황도 종종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화이트리스트는 일본 기업이 외국에 수출할 때 그 절차를 간소화해주는, 일종의 혜택을 받는 국가 목록이다. 한국은 지난 2004년 아시아국가론 처음으로 이 명단에 포함됐다. 일본은 한국을 비롯해 ‘안보우호국’ 27개국에 대해 화이트리스트 제도를 적용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일본이 ‘믿을 수 있는’ 국가라는 게 화이트리스트 의미다. 화이트리스트에 올랐다가 배제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시행령 개정의 경우 관보 게재 후 21일이 지나면 적용된다. 따라서 늦어도 8월 말 이전 한국은 화이트리스트에서 빠지게 된다.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은 이번 결정에 대해 “뭔가에 대한 대항조치가 아니다”라면서 “절차를 제대로 밟고, 관리를 한다면 수출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지난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이후 시작된 일본 측의 경제 보복 연장선상에 있다는 게 중론이다.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재지정 여부에 대해서 세코 장관은 “한국과 신뢰감을 갖고 대화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되면 일본이 지정한 전략물자 수입 과정이 까다로워진다. 일본은 무기 개발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는 1120개 품목을 전략물자로 지정해놓고, 이 중 민감도가 높은 263개를 ‘민감 품목’으로 따로 분류했다. 화이트리스트 국가라도 민감 품목은 개별 허가를 거쳐야 한다. 나머지 857개에 대해서만 우대를 받는다는 얘기다. 그런데 앞으로 한국은 857개 품목 역시 개별적으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지금까진 화이트리스트 국가로서 3년마다 포괄적인 수출 심사를 받았지만 앞으론 수출 건별로 6개월마다 새로 심사를 받아야 한다. 또 처리기간이 1주일에서 90일 이내로 늘어나고, 제출해야 할 서류도 복잡해진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캐치올’ 통제를 받게 된다는 점도 우려했다. 캐치올은 비전략물자라도 대량파괴무기 등에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물품을 수출할 때 정부 허가를 받도록 하는 제도다. 그동안 일본은 화이트리스트 국가에 대해선 캐치올 적용을 면제했다. 캐치올 품목을 정하는 것은 특별한 기준이 없다. 이는 일본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경제 전 부문에 대한 수출 규제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일각에선 수출 자체를 금지하는 게 아닌 이상 그 파장은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는 반론도 나온다. 앞서의 세코 경제산업상 역시 비슷한 취지로 말했다. 정해진 심사를 거쳐 물건을 수입하면 될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제 전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현 상황을 고려해보면 일본 정부가 심사 과정에서 시간을 끌거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수입은 차질이 불가피해진다. 일본이 1차 수출 규제 조치에 포함됐던 3개 품목에 대해 아직 단 한 건의 수출 허가도 내주지 않았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도발’에 대해 “우리는 다시 일본에 지지 않는다”면서 강경한 대응을 천명했다. 문 대통령은 8월 2일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는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명백한 무역보복”이라고 규정한 뒤 “우리 정부는 상응하는 조치를 단호하게 취해 나간다. 우리 역시 맞대응할 방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오늘의 대한민국은 과거의 대한민국이 아니다. 국민의 민주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경제도 비할 바 없이 성장했다”면서 “지금의 도전을 오히려 기회로 여기고 새로운 경제 도약 계기로 삼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일본을 이겨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치권 역시 모처럼 한목소리를 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한 아베 내각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며 정부를 꼬집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참으로 옹졸한 처사”라고 직격탄을 날렸고, 이인영 원내대표도 “경제 한일전에 반드시 승리하도록 모든 역량과 수단방법을 총동원해 대처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당 역시 “일본의 치졸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다만, 한국당은 문재인 정부 대처 능력 등도 함께 공격하는 ‘투트랙’ 전략을 들고 나왔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외교 전문가들로 구성된 범국가적 비상대책기구 출범을 제안하기도 했다. 각 당들은 일본 경제보복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에 대한 지원책 마련에도 분주한 모습이다.
문 대통령이 맞대응을 밝힌 이상 과연 어떤 카드를 들고 나올지를 두고도 관심이 모아진다. 이와 관련해 친문 한 핵심 의원은 “문 대통령 결심이 굳어진 것으로 들었다. 3주 정도의 기간 동안 외교적인 노력을 해보겠지만, 되돌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지소미아 파기 발표는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WTO 제소 등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지소미아는 우리가 들고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카드다. 우리의 결의를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들이 당청에서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고 했다.
지소미아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이다. 양국이 군사기밀을 공유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파기론자들은 일본의 2차 경제 보복이 안보우호국 배제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 역시 안보적 대응을 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민주당 의원들 상당수가 “일본이 우리를 안보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지소미아는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소미아 파기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었던 이해찬 대표 역시 2일 “이렇게 신뢰 없는 관계를 가지고 지소미아가 과연 의미가 있는가하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저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겠다”며 파기를 시사했다.
지소미아는 양국이 매년 기한 90일 전에 폐기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자동 연장된다. 의사 통보 만기일은 8월 24일이다. 여당에선 파기가 우세하지만 안보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파국을 막아야 한다는 신중론도 적지 않다. 보수진영에선 “지소미아 파기가 외교적 고립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7월 31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화이트리스트 제외 시 지소미아를 파기해야 한다는 응답이 47%를 기록했다. 반면, 연장은 41.6%였다. 파기 의견이 5.4%포인트 높았다. 모름·무응답은 11.4%였다(자세한 사항은 리얼미티 홈페이지 참고).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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