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트랭티낭은 1962년에 태어났다. 아빠는 배우인 장 루이 트랭티낭, 어머니는 소설가이자 감독인 나딘 마퀀드였다. 마리는 네 살 때 아빠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내 사랑, 내 사랑’(1967)에 출연하면서 배우로 데뷔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릴 적부터 배우의 꿈을 꾸었던 건 아니다. 매우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부끄러움을 심하게 탔다. 하지만 10대가 되었을 때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프랑스 영화를 대표하는 세자르상 후보에 다섯 번이나 오르는 연기파 배우가 된다. 한편 그녀는 네 번의 결혼과 동거를 통해 아들 넷을 낳은 어머니이기도 했다.
마리 트랭티낭
40대에 접어들면서 배우로서 원숙미를 더해가던 시기, 마리 트랭티낭은 록 뮤지션 베르트랑 캉타와 연인 관계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밴드 ‘느와르 데지레’(검은 욕망)를 이끌며 ‘프랑스의 짐 모리슨’이라는 평가를 얻었던 캉타는 마리 트랭티낭보다 두 살 적은 록 스타였다. 아트 디렉터인 크리스티나 라디와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지만, 2002년 마리 트랭티낭을 만나면서 아내와 헤어진 상태였다.
트랭티낭과 캉타는 2003년 7월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로 여행을 갔다. 이때 사건이 일어났다. 호텔 방에 있을 때 트랭티낭에게 전남편의 문자가 왔는데, 그것을 본 캉타가 갑자기 치솟은 질투심에 트랭티낭을 때린 것. 캉타에게 맞은 뒤 고통을 겪던 트랭티낭은 프랑스에 있는 남동생에게 힘겹게 전화를 했고, 그 전화를 받은 남동생이 리투아니아 쪽으로 전화를 걸어 호텔에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구타 사건이 일어난 지 7시간 뒤였고, 병원에 옮겨진 트랭티낭은 코마 상태였다. 그리고 8월 1일, 뇌실 안에 물이 고이는 뇌수종으로 세상을 떠난다. 사건이 일어난 지 6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검시 결과 캉타는 트랭티낭의 머리를 19차례에 걸쳐 강하게 때린 것으로 밝혀졌고, 회복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법정에서 캉타는 네 차례 정도 가볍게 때렸을 뿐이고, 이후 트랭티낭은 침실로 가 잠이 들었다고 증언했다. 재판은 이어졌고 사건이 일어난 지 8개월 뒤인 2004년 3월, 리투아니아 법정은 그에게 간접적 의도에 의한 살인죄를 적용해 징역 8년형을 선고했다. 피고와 원고 모두 불만이었다. 유족들은 캉타가 죽일 의도로 폭력을 가했다며 더 높은 형량이 선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캉타는 그 어떤 살인 의도도 없었다며 형량을 낮춰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선고대로 집행되었고, 캉타는 2004년 9월에 프랑스의 교도소로 옮겨졌다.
프랑스 형법에 의하면 형기의 절반 이상을 복역한 죄수 중 모범수가 되면 출소 후 보호관찰 대상이 될 수 있는 제도가 있는데, 베르트랑 캉타가 이 제도의 수혜를 받아 2007년 10월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이에 많은 여성 단체의 항의 시위가 이어졌고 아버지인 장 루이 트랭티낭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은 사르코지 대통령과 법원을 대상으로 캉타의 재수감을 요구했지만, 결국 캉타는 세상에 나왔다.
출소한 캉타는 5년 전에 헤어진 아내 크리스티나 라디와 재결합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2010년 1월 10일, 라디는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죽은 다음 날 아이들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문제는 자살하던 그 날 캉타가 그 집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라디의 죽음과 캉타의 관련성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는데, 라디가 부모에게 전화해 앤서링 머신에 남긴 메시지가 공개되면서 소문은 서서히 사실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베르트랑 캉타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 건 죽기 6개월 전부터였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캉타가 가하는 폭력에 대한 것이었다. 물건을 집어 던지는 물리적 폭력도 있었지만, 라디는 캉타가 자신을 정신적으로 너무 괴롭힌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실 캉타에게 라디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가 트랭티낭 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별거 중임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그를 지켜주었던 사람이 바로 라디였던 것. 그런 부분이 고마웠는지 캉타는 재결합을 원했지만,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성향이 드러나 버린 것이다. 그리고 메시지엔 이런 내용마저 있었다. “트랭티낭이 죽었던 2003년 때보다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몇 달 뒤, 그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고 말았다.
라디의 자살과 캉타의 관련성에 대한 경찰 조사가 이뤄졌지만 결정적 증거는 찾지 못했다. 캉타는 무혐의로 풀려났고, 2010년 7월에 그에 대한 보호관찰도 끝났다. 그리고 3개월 뒤인 2010년 10월, 그는 음악계에 컴백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다시 대중 앞에 선다는 사실에 프랑스의 거의 모든 여성 단체가 반발하며 시위에 나섰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건 그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억측으로 인해 마치 ‘여성의 적’ 혹은 ‘아내 킬러’처럼 여겨진다고 항변했다는 것. 이에 언론은 “나르시시즘에 빠진 킬러” 혹은 “자기 연민의 최고수” 같은 말로 비판했다. 한편 그가 속했던 ‘느와르 데지르’는 2010년 11월에 해체했고, 이후 그는 솔로로 활동 중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