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7월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30대 기업 대표들을 초청해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일본 수출 규제가 발동한 지 6일째인 7월 10일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30대 그룹 기업 총수 및 최고경영자(CEO), 4개 경제단체(한국무역협회·한국경영자총협회·중소기업중앙회·중견기업연합회) 장을 불러 모았다. ‘일본통’으로 불리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은 패싱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일본은 막다른 길로 가지 말라”며 한·일 갈등 사태의 장기화를 처음 언급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부품·소재·장비 국산화와 수입선 다변화 등 대책을 논의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상 120분간 ‘잘하자’는 정치적 수사만 나열한 자리였다.
당초 삼성전자는 불참 쪽으로 기울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7월 7일부터 일본 수출 규제 해법을 찾기 위해 전격 방일길에 올라섰다. 청와대 재계 참석자 명단에도 삼성전자는 없었다. 하지만 이 명단이 7월 6일 오후 청와대 출입기자들 사이에 돌자, 몇 분 후 윤부근 부회장이 포함된 정정 명단이 돌았다. 청와대 기자들 사이에선 “청와대 내부 자료가 풀리자, 삼성전자가 서둘러 참석하겠다고 통보한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우여곡절 끝에 청와대 간담회는 열렸지만, 구체적인 해법은 없었다.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2시간 동안(오전 10시 30분∼12시 30분) 진행한 당일 간담회에서 기업인 발언 시간은 1인당 3분으로 제한됐다. 전체 참석자 34명 중 18명만이 마이크를 잡았다. 당시 사회를 본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기업인 발언이 2분을 넘기는 시점에 ‘1분 알림’ 팻말을 들었다.
문 대통령은 허창수 GS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말없이 마이크를 넘기자, “하실 말씀이 없으시냐”며 발언을 권유하기도 했다. 올해 1월 15일 청와대에서 ‘2019 기업인과의 만남’을 한 지 6개월 만에 가진 재계 총수와의 만남은 오찬도 없이 마무리됐다. 앞서 일본이 7월 4일 반도체 3종(고순도 불화수소·포토레지스트·플루오린 폴리이미드)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를 한 직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었던 셈이다.
청와대가 기업인과 스킨십을 늘리면서 보폭을 넓혔지만,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선포한 7월 1일 당일에는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대응한다”는 말 이외에 아무런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 재계 안팎에선 ‘제2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공포가 재연되는 게 아니냐’라는 우려도 파다했다. 박근혜 정부 때 단행된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한국 기업 피해는 속출했다. 중국에 진출했던 롯데·현대차의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다. ‘고래(정부) 싸움’에 ‘새우 등(기업)’만 터진다는 불만까지 터져 나왔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상조 정책실장은 8월 8일 5대 그룹 주요 경영진을 만났다. 김 실장은 일본의 화이트 리스트 배제 후 청와대가 설치한 상황반의 반장을 맡고 있다. 태스크포스(TF) 팀장은 윤건영 국정상황실장이다. 김 실장은 7월 7일에도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함께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대기업 총수와 만나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이는 문 대통령과 30대 그룹 총수의 간담회 사흘 전이다. 문 대통령은 8·15 광복절 전 추가로 기업인들과 만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1월 2일과 7일 중소기업중앙회 신년회와 중소벤처기업인 청와대 초청 등을 시작으로 올해 들어 경제인과의 만남 횟수를 늘리고 있다. 대기업 한 관계자는 “특별한 대책을 강구하는 것도 아니고 왜 만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재계 내부에는 청와대가 정작 중요한 사안에 대해선 ‘뒷짐’을 지면서 보여주기식 소통만 한다는 불만이 많다. 일본 발 경제 보복 한 달 전 일어난 ‘화웨이 사태’를 둘러싼 미·중 갈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G2가 한국을 향해 ‘내 편에 서라’고 압박했지만, 청와대는 “기업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는 취지의 스탠스를 보였다. 사드 사태를 겪고도 수수방관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추산한 2017년 당시 중국의 사드 보복 피해액은 8조 5000억 원에 달했다.
실제 중국은 6월 4∼5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글로벌 정보통신(IT) 기업 관계자를 불러 미국의 ‘반화웨이 전선’에 동참하지 말라고 압박했다. 반면 미국 국무부는 같은 달 8일(현지시각) “외국 정부의 불법적이거나 통제되지 않는 강요를 받게 될 위험이 있는 화웨이와 같은 공급자들의 위험성을 엄격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압박했다. 중국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압박하는 사이, 미국은 청와대에 경고장을 날린 셈이다. 미국의 경고장은 청와대가 사흘 전 ‘한국 내 화웨이 장비가 한·미 군사안보에 영향이 없다’던 입장을 180도 뒤집는 발언이었다. 당시는 미·중 무역전쟁이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아베의 도발 사태도 마찬가지다. 청와대와 정부의 안일한 대응이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대법원이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중공업 피해자에 대해 배상명령을 판결한 것은 지난해 10월 30일과 11월 29일이다. 올해 1월 9일 대법원 배상판결 관련 정부 간 협의를 요청한 일본은 5월 20일 제3국 중재위원회 개최를 한국에 요청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사법부 판단 존중’이란 원칙하에 삼권분립을 이유로 적극적 개입을 꺼렸다. 양국 기업이 자발적으로 출연금을 내는 방안을 제시한 것은 7월이다. 정부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 전 서둘러 봉합책을 낸 셈이다.
청와대 상황반장인 김 실장은 일본 경제 보복 발동 직후인 7월 3일 방송사 간부들과 만나 정부의 ‘무대응 논란’ 논란에 대해 “우리가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며 “우리 (롱) 리스트의 1∼3번째에 해당하는 품목이 이번에 일본이 규제한 품목들이었다. 우리가 가장 아프다고 느낄 1∼3번을 짚은 것”이라고 말했다. 6월 30일 일본 산케이 신문이 수출 규제를 기정사실로 하자, 5대 그룹에 추가조치 예상 품목과 정부에 요청했다.
이 과정을 통해 만든 롱 리스트 1∼3번과 일본의 1차 수출 규제 품목과 정확히 일치했다는 것이다. 야당과 재계에선 “알고도 당한 것이냐”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이낙연 국무총리조차 “김 실장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에 김 실장은 “유념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사태 해결의 골든타임을 실기한 정부가 이후 기업인 만남 등을 통해 늑장 대응 및 책임 전가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쌍 태풍(미·중 및 한·일 전쟁)’에 흔들리는 한국 경제다. 미·중·일의 몰려드는 삼각파도에 한국 경제 성장률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미·중 ‘관세 전쟁’에다가 ‘비관세 전쟁’인 일본 수출 규제로 최악의 경우 1%대 경제성장률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일본 수출규제로 “한국 기업의 신용등급이 하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블랙 먼데이’였던 8월 5일 국내 증시에서 증발한 시가총액만 49조 2000억 원(코스피 33조 5000억 원·코스닥 15조 7000억 원)에 달했다.
당일 코스피(1946.98)와 코스닥(569.79)은 3년 1개월과 4년 7개월 만에 최저치였다. 원화 가치도 1215.3원으로 3년 5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이 수출규제로 대일 맞대응에 나선다면,국내총생산(GDP)은 추가로 1.13%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중 및 한·일 전쟁으로 ‘수출 감소→기업 신용등급 하락→외국인 자금 이탈→금융위기’ 등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얘기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장기적으로 우리의 금융시장이 불안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