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재팬’ 운동이 가열되는 가운데 지자체들이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으나, 일각에선 ‘관의 개입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사진은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의 일본 정부 규탄 기자회견 사진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고성준 기자
서울시 중구청은 8월 15일 제75주년 광복절을 맞아 퇴계로, 을지로, 태평로, 동호로, 청계천로, 세종대로, 삼일대로 등 서울 도심 22개 거리에 태극기와 함께 노 재팬 배너기 1100여 개를 설치할 예정이었다. 여기에는 ‘노(No), 보이콧 재팬(boycott Japan),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중구청은 8월 6일 밤부터 설치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을 앞당겨 오전부터 50여 개를 설치한 상태였다.
이를 놓고 논란이 뜨겁게 벌어졌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엔 ‘서울 한복판에 NO Japan 깃발을 설치하는 것을 중단해 주십시오’라는 청원글이 올라왔다. ‘잘못은 아베 정부가 했는데 일본 관광객들에게 공포심을 줄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민간인이 주도하는 일본 불매운동에 관이 개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었다.
서양호 중구청장은 결국 배너기를 내렸다. 서 청장은 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중구청의 ‘노 재팬’ 배너기가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을 동일시해 일본 국민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와 불매운동을 국민의 자발적인 영역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비판에 대해 겸허히 받아들인다. 설치된 배너기는 즉시 내리겠다. 국민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자체들의 ‘일본 불매운동’은 증가하는 추세다. 일본산 제품 불매는 기본이고 공사 발주 시 일본산 자재를 제외하거나 일본 지역으로의 공무 목적 출장 또는 연수를 배제한다는 내용이다.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은 전국 기초지방자치단체장들의 참여를 촉구하는 ‘1일 1인 일본 규탄 챌린지’를 시작했다. 캠패인의 첫 스타트를 끊은 문 구청장은 “캠페인을 통해 지방정부연합의 취지에 동참하는 지자체가 더욱 늘길 바란다”고 밝혔다. 문 구청장으로부터 지목받은 박용갑 대전 중구청장이 그 뒤를 이었다.
전국 각 시도교육청은 일본제품 불매 운동과 일본 방문 자제 권고 등 관련 조치에 나섰다. 전남도교육청과 경남도교육청 등은 산하기관 및 일선 학교에 공문을 보내 일본 공무출장과 현장 체험학습 자제를 권고하며 기관 교류 및 연수 자제 등을 지시했다. 강원도교육청도 도교육청, 직속기관, 교육지원청의 일본교류 사업 실행을 전면 취소했다고 밝혔다.
경기도교육청은 뚜렷한 조치를 내놓지 않는 상황이다. 경기도교육청 측은 이에 대해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위해 교육청에서 지시하지 않는 것”이라며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먼저 ‘일본 불매 결의문’ 등을 발표하기도 한다. 우리도 이런 자연스러운 문화를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따라서 경기도교육청 차원에서의 지시는 내리지 않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태로 피해를 본 기업들에게 지원을 약속한 지자체도 있다. 경상남도는 일본 수출규제피해 기업을 대상으로 300억 원 규모의 긴급 경영안정자금을 투입했다. 이에 따라 업체당 10억 원에서 12억 원까지 대출액을 확대했고, 대출 횟수 제한도 없다. 세종시 역시 피해상황을 조사한 뒤, 중소기업 육성자금 100억 원 지원 계획을 밝혔다. 이밖에 전남도청은 경영안정자금 지원과 지방세 징수유예 등을, 충남도청은 금융지원과 세제 지원에 나섰다.
경기도의회는 지난 3월 도내 학교가 보유한 ‘전범 기업’ 생산품에 인식표(스티커)를 붙이는 조례 제정을 예고했다가 한동안 비판을 받기도 했다. 외교적 마찰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이를 발의한 황대호 더불어민주당 도의원은 8월 26일 임시회에 이 내용을 담은 조례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과거엔 불필요한 반일 감정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보류됐지만, 최근 ‘일본 불매’ 바람에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이 조례안은 ‘의무적 부착’이라는 내용의 3월 조례안과 달리, 부착 여부를 학생들 스스로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례는 큰 마찰 없이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 3월 당시에도 도의회 소속 민주당 다수 의원들이 찬성했으며, 최근 도의회 고문변호사들 대부분이 ‘문제 없다’는 취지의 유권해석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강원도청은 이 같은 흐름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강원도청은 현 사태에 비상대책반을 운영하며 나름의 대응에 나섰지만, 다른 한편에선 자치단체 차원의 한일 교류행사는 그대로 강행하기로 했다. 이 행사는 9월 3일로 예정된 ‘강원도-일본 돗토리현 자매결연 25주년 기념식’으로 1994년 자매결연 체결 이후 우호협력 관계를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알려졌다.
강원도청 측은 “축소한 뒤 그대로 진행할 것인지 취소할 것인지 논의 중이다. 최문순 지사에게 보고할 예정”이라며 “언론을 비롯해 여론에서 불편함을 표하고 있어서 (진행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제주도는 일본에서 열리는 조선통신사 한일 문화교류 사업에 도내 민속 예술단을 참가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서귀포시와 자매도시인 일본 기노카와시와 진행키로 한 중학생 홈스테이도 무기한 연기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일본 관광 시장이 얼어붙자 제주도는 고심에 빠졌다. 대한항공에 따르면 대한항공의 제주~일본 직항편은 제주에서 운항하는 국제선 항공편의 70~80%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7~8월) 제주도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의 수가 줄어들지 않은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제주도는 ‘일본 관광시장 대응 전략회의’를 열고 일본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전략팀을 가동키로 했다. 제주관광공사 관계자 역시 “일본과 계획된 행사 등은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