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8월 5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수석 비서관·보좌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한미일 동맹은 미국의 필요성에 의해 탄생했다.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동북아시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는 한미일 동맹의 근간을 흔들었다. 당사자인 한일뿐 아니라 한미 간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이유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보여준 일련의 모습들은 ‘자국 이익 우선주의’라는 국제 외교의 냉혹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7월 초부터 시작된 일본의 경제보복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국제사회 불문율을 깬 명백한 ‘반칙’이었다. 하지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를 지켜만 봤다. ‘미국의 소리’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내가 얼마나 더 많은 것에 관여해야 하냐”면서 “북한 문제에 관여해 당신을 도와주고 있고, 다른 많은 것들에 관여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는 일본 경제보복 조치에 있어서만큼은 관여할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읽혔다. 국제사회 일각에선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 묵인 하에 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이른바 트럼프-아베 밀약설까지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측이 물밑에서 움직였던 정황도 포착됐다. 7월 22일 트럼프 대통령 최측근 볼턴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일본을 방문했다. 외신 등에 따르면 볼턴 보좌관은 아베 총리를 만나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지 말라’, ‘미국과 이란의 군사 갈등 지역인 호르무즈 해협으로 파병하라’는 두 가지 요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이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했고, 호르무즈 해협으로 파병도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미국 정가에선 “일본이 막나간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 소식통은 “헤리티지 재단이 최근 보고서에서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분쟁을 중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헤리티지 재단이 일본에 대해 날선 비판을 쏟아냈다고 봐야 한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헤리티지 재단이 한국과 일본이 부딪혔는데 일본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어 그는 “전 세계 언론, 미국 싱크탱크가 아시아 역학관계에서 일본에 등을 돌렸다는 건 굉장히 큰 문제로 받아들여야 할 것”라고 꼬집었다.
8월 7일 발간된 헤리티지 재단 보고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미국은 한일 무역 분쟁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제목의 보고서 말미엔 ‘도쿄와 서울은 즉시 실무 수준에서 무역 규제에 관한 대화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미 상무부는 무역 규제 관련 일본 및 한국 관리들과 실무 회의를 개최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수출 규제를 일본이 먼저 내민 카드인 만큼, 일본에게 ‘정상으로 돌아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보고서는 ‘일본과 한국은 중요한 경제 파트너이자 아시아의 미국 외교 정책의 기초다. 현재 상황은 미국의 전략적 목표를 위험에 빠뜨린다’며 ‘위험을 막기 위해 무대 뒤 조율자로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지 않고 있는 트럼프를 꼬집은 셈이다. 헤리티지 재단은 보수 성향의 싱크탱크로 미국 정책 결정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곳이다. 이를 종합하면 미국으로서도 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흐르는 것은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8월 3일 저녁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베규탄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정권 규탄 3차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임준선 기자
차 연구원은 이어 “아베 총리는 미국이 우리에게 묻고 싶었던, ‘미래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한국은 끝까지 우리(미일)의 동맹인가’라는 질문을 대신했다고 봐야 한다. 그 질문에 한국은 ‘친구 아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라며 “물론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먼저 고개를 숙일 순 없지만 일본도 발을 빼는 이 시점부터는 우리도 ‘질서 있는 퇴각’을 해야 할 필요성은 있다. 지소미아(GSOMIA) 폐기나 한국도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방안 등 강경 대책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게 좋아 보인다”고 조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갑작스레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문제를 거론한 이유도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여진다. ‘한국은 미래에도 중러가 아닌 미일과 친구인가’라는 질문에 한국이 ‘(적어도) 일본과는 친구가 아니다’를 분명히 한 이상 트럼프 대통령도 계산기를 다시 두들기고 있다는 얘기다.
차 연구원은 “방위비 분담금은 매년 협상을 해야하는 만큼 이맘때에 항상 시끄러웠긴 했다”면서도 “한국이 ‘친구냐, 아니냐’란 질문에 몰리면서 반대급부로 트럼프는 꽃놀이패를 쥐게 된 것이다. 한국이 얼마나 동맹에 목을 매는지 방위비 분담금을 통해 알아보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분담금을 더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트럼프는 손해 날 게 없다”고 설명했다.
반면, 방위비 분담금을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있다. 전현준 국민대 겸임교수는 “트럼프가 방위비 분담금을 각국에 더 내라고 한 건 선거 때부터 나왔던 하나의 공약이었다. 최근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며 “트럼프 개인 성향은 돈을 더 내는 사람이 진짜 동맹이다. 신의, 신뢰는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런 트럼프가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내라고 하는 건 한국으로서는 빠져나가기 어려운 수다. 그렇다고 한국이 ‘주한 미군 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중국과 한 편을 맺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어쩔 수 없이 올려주긴 해야 할 것”라고 말했다.
한미일 동맹과는 별개로 중국과의 관계 역시 ‘산 넘어 산’이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국내 사업가는 최근 현지로부터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친 사업을 일방적으로 해지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자세한 이유는 들을 수 없었지만 이 사업가는 “현지 업체들이 한국 회사와의 거래를 속속 중단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압력이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라고 귀띔했다. 그는 “사드 사태 이후 간신히 회복 조짐을 보였는데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자세한 사정을 듣기 위해 접촉한 중국 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사드 배치 이후) 우리가 크게 변한 것은 없다. 군사적으로 사드가 우리에게 큰 피해를 끼쳤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면서 “미국과의 무역 분쟁 과정에서 한국 측이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는 부분은 중국 정부로서 그러한 입장을 재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아마 이런 기조가 민간 부문 교류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귀띔했다.
중국의 이런 스탠스는 일본과의 경제전쟁에 ‘올인’하고 있는 대한민국으로선 또 하나의 ‘복병’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중국이 미국과 ‘환율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강경 기조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한중 관계의 문제가 아닌, 미중 간 패권 다툼의 연장선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은 까닭에서다. 중국 입장에선 대한민국 뒤에 있는 미국을 염두에 둔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지난 7월 23일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의 대한민국 영공 침범은 이러한 현실을 잘 드러내주는 사건으로 읽힌다. 이날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는 합동군사훈련을 핑계로 한국 방공식별구역(카디즈)은 물론 독도 영공까지 침범했다. 우리 군은 러시아 군용기를 향해 경고 사격까지 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선 러시아와 중국이 손을 잡고 미국을 향해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의도야 어찌됐건, 대한민국이 미중러 갈등의 시험대가 된 셈이었다.
100여 년 전에도 이랬다. 미국 일본 러시아는 조선을 호시탐탐 노렸다. 우리가 기댔던 중국(청나라)은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였다. 미국과 손을 잡은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하며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다져 나갔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을 당했다. 그 상황은 다르지만 한반도 주변 4강들이 자국 이익에 따라 첨예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실이다.
물론, 구한말과 지금을 동일선상에서 놓긴 어렵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국력은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졌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우리 역량이 많이 커졌다. 한미일이 (안보상) 동맹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면서도 “일종의 비유법으로 교훈적이긴 하다. 대응을 잘 못 했다가는 국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각성하자는 뜻에서 구한말을 되짚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구한말과의 또 다른 차이점은 바로 북한이다. 현 시국에서 북한 이슈가 어떻게 작용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 경제 보복 조치 직후 “남북 간의 경제협력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단숨에 일본 경제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일본의 경제 보복은) 경제 강국으로 가기 위한 우리 의지를 키워주는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일본 도발에 대한 강경 대응 방침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미로 읽혔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문 대통령 발언은 야권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맞기도 했다. 정치권에선 미중러일로부터 포위된 것을 뜻하는 ‘사면초가’ 대신 미중러일에 북한을 포함시킨 ‘오면초가’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 미사일 발사가 한일 관계를 푸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익명을 원한 국방과학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한미일 안보 동맹의 연결고리는 북한 문제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세 나라의 동맹의 필요성은 더욱 부각될 수 있다”면서 “이 경우 한일 갈등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점쳤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