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우대국)에서 제외하는 법령 개정안을 지난 8월 7일 공포했다. 앞서 ‘고순도 불화수소’와 ‘EUV(극자외선)용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가지 품목을 특정했던 지난 7월 초와 달리 추가적인 제한 품목은 특정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이 언제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품목을 제한할 수 있는 불확실성이 커진만큼 국내 기업들은 일본 의존도를 최대한 낮추기 위한 ‘탈일본’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일본의 수출 제한 조치에 맞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들의 ‘탈일본’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사진은 삼성전자. 사진=고성준 기자
이런 와중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계의 탈일본 작업은 속도가 빠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5월 사이 수입액 기준 일본 수입의존도는 포토레지스트 91.9%, 불화수소 43.9%,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93.7%를 기록했다. 이들 품목은 일본의 기술 수준이 세계적으로도 월등히 높아 대체재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관계자는 모두 “어떤 품목을 어떻게 대체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해 줄 수 없다”면서도 “일부 테스트는 조만간 마무리 될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일본 수출 제한 조치의 ‘첫 타깃’으로 지목됐었던 만큼 일찌감치 탈일본 기조를 정하고 반도체 양산 라인에서 일본산의 대체를 위해 다양한 테스트를 해왔다. 삼성전자는 지난 7월 이재용 부회장이 5박 6일 동안 일본에 다녀온 직후 일본산 소재 의존도를 전사적으로 파악했고, 곧바로 국산과 제3국 소재를 활용해 제품을 생산해 보는 실험을 이어왔다. 같은 기간 SK하이닉스 역시 소재를 바꿔 테스트를 하고 있으며, 연구개발 중이던 일부 품목에선 속도를 높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의 경우, 갤럭시 폴드 등 폴더블 폰 등을 만들때 쓰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국내 대체에 성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내년 이후로 국내 및 독일 업체를 통해 UTG(Ultra Thin Glass)로 소재를 바꿔나갈 계획이다. 일부 업체와는 스마트폰용 폴리이미드 제공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고순도 불화수소는 중국에서 저순도의 불산을 들여와 국내에서 정제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 중이다. 이 소재는 일본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만큼 대체가 어렵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업체들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미리 확보해 둔 일본산 재고와 새로운 방법으로 들여온 소재를 함께 테스트하고 있다”며 “아직까지 뚜렷한 문제점이나 부작용 등은 없었다. 이대로라면 일본 의존도를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포토레지스트는 SK하이닉스에선 연구단계고, 국내 업체가 국산화를 빠르게 진행 중이지만 기술 난이도가 높아 시간이 다소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는 최근 벨기에 소재 업체 등 해외에서 조달 받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6~10개월치 물량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 관계자들은 삼성전자에 물량을 공급한 업체는 일본 반도체 소재업체와 벨기에 연구센터가 2016년 설립한 합작법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법인은 일본 정부의 수출 제한 조치 발표 직후부터 국내기업들이 규제품목을 조달할 우회 공급로로 거론돼 왔다.
SK하이닉스. 사진=고성준 기자
다만 이러한 대응이 완벽한 해법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의 수출 제한 조치에 비교적 빠르게 대응했지만, 급한 불을 껐을 뿐이라는 게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지금까지는 일본이 제한한 3가지 품목을 중심으로 대체재를 마련해왔지만 여기서 품목을 늘리거나 반도체와 스마트폰 분야 전체로 범위를 더 넓히면 완전한 탈일본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복수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국산화에는 공감하지만 모든 과정에서 일본산 소재를 완전히 배제하는 건 어렵다는 결론이 최근 내려졌다. 반도체 생산 공정이 민감해 한 번 현장에 투입한 소재는 5~10년은 쓰게 되는 만큼 이를 단기간에 바꿀 수 없어서다. 더구나 품질이 좋은 일본산 소재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의 ‘경쟁력’ 중 하나로 통해왔다. 완전한 탈일본을 하려면 먼저 수출 제한 조치가 내려진 3가지 품목에 더해 모든 과정에서 일본산을 대체할 만한 세계적 품질과 기술을 가진 소재를 찾거나 만들어 내야한다.
다른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국산화든 제3국에서 들여오든 소재 대체에 성공했다고 하려면 새로 만든 반도체 품질이 지금과 비슷하거나 더 나아야한다. 테스트부터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상당히 많이 필요하다”며 “태생적으로 일본과 한국, 미국이 분업하는 형태로 움직이는 산업이다. 쉽게 말해 일본이 소재나 부품을 팔면 우리나라가 반도체를 만들고 미국은 그 반도체를 활용해 IT 완제품을 만드는 구조다. 일본이 이러한 ‘글로벌 밸류 체인’을 흔들었다 하더라도 국내 반도체 업체가 기술적으로든 경영적으로든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이 같은 지적에 힘을 싣는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 12일 개최한 ‘소재·부품산업, 한일 격차의 원인과 경쟁력 강화방안’ 세미나에서 이덕환 서강대 교수는 “소재부품 경쟁력 강화 논의는 글로벌 무역구조와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작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소재부품산업의 경쟁력 강화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다만 자원 부족 국가로서 필요 소재를 수입해야 하므로 완벽한 국산화는 꿈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 수출규제의 대상인 고순도 불화수소의 탈일본화는 중국산 저순도 불화수소 또는 형석과 황산 수입의 증가를 의미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홍배 동의대 무역학부 교수도 한국의 대일 의존도가 감소하는 추세지만 일본의 고부가가치 기술을 단기간에 대체하긴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일본의 소재부품 산업은 고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의 소재부품 산업은 중기술 개발에 치우쳐있다”며 “10년 안에 한국의 기술 수준이 일본의 99.5%까지 높아져도 남은 0.5% 차이가 일본의 핵심 경쟁력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국산화나 제3국을 통해 소재를 확보하는 건 여러 가지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라며 “완전한 탈일본 보다는 이번과 같은 리스크에 대비해 공급라인을 다변화하는 게 현실적이고 바람직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