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2일 오전 9시. 뜨거운 날씨만큼이나 제주지방법원은 재판 시작 전부터 달아올랐다. 충돌 등 사고를 우려한 제주지법은 재판 방청권을 주는 방식으로 방청객을 제한했는데, 이는 제주지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제주도민들의 관심이 뜨거웠는데, 방청권을 얻기 위한 긴 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오전 8시 50분. 고유정이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 씨는 연녹색 수의를 입고 그동안 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가렸던 모습 그대로 법정에 들어섰다. 방청객들은 고 씨를 향해 “살인마”라고 소리를 치거나, “고개를 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판 도중에도 야유는 계속됐다. 고 씨 변호인이 ‘계획범죄가 아니’라고 항변하자 “추잡스럽다”는 탄식이 나왔다. 피해자 유족 역시 고 씨를 비난했다. 피해자의 남동생은 “여전히 우발범죄를 주장한다면 정상참작의 여지도 없다고 생각한다”며 극형을 요구했다.
법조계는 고 씨가 ‘고의성과 계획성’을 부인하는 전략을 선택한 만큼, 양형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계획 살인이라고 보면 무기징역도 가능하지만, 우발적 살인이라고 볼 경우 징역 10~20년 내외의 양형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8월 12일 오전 제주지법에서 첫 재판을 받고 나온 고유정이 와 호송차에 오르기 전 한 시민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있다. 연합뉴스
# “우발적 범죄” Vs “계획 범죄” 입증 자신하는 검찰
12일 제주지법 형사2부(정봉기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첫 공판에서 고 씨 변호인은 “계획된 살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피해자인 전남편이 성폭행을 하려고 해서, 이를 피하려다가 발생한 범죄라는 것. 고 씨 변호인은 “피해자가 아들과의 면접교섭이 이뤄지는 동안 스킨십을 유도했다. 피해자가 제주도 펜션으로 들어간 뒤 아들이 방에서 게임을 하는 동안 싱크대에 있던 피고인에게 다가가 갑자기 몸을 만지는 등 성폭행을 하려 했다”고 항변했다.
살해한 건 맞지만 “살인죄는 성립할 수 없다”고 밝힌 것이다. 우발적인 범행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폐쇄회로(CC)TV도 근거로 활용했다. 고 씨 변호인은 “고 씨가 폐쇄회로TV에 얼굴을 노출시키면서 한 모든 일련의 행동은 경찰에 체포될 수밖에 없는 행동”이라며 “계획적인 범행이 아니라는 반증”이라고 덧붙였다.
검찰은 고 씨의 범죄 증거로 이불에 묻은 혈흔을 내세웠다. 이불에 묻은 혈흔에서 졸피뎀이 나왔는데, 고 씨가 받은 졸피뎀 처방 내역을 고려할 때 미리 준비한 범행이라는 추론이었다. 또 범행 10여 일 전부터 포털 사이트 등에 검색한 키워드 ‘수면유도제, 니코틴 치사량, 전기충격기, 소각, 분쇄기, 뼈의 무게, 이민가방’ 등도 근거다.
#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시신이 ‘작은’ 변수
전남편을 살해한 뒤 시신을 쓰레기봉투 등에 담아 훼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고유정. 제주 동부경찰서는 수사 초반 고유정의 진술을 믿고 제대로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은 탓에, 쓰레기봉투 유기 사실도 뒤늦게 파악됐다.
고 씨가 쓰레기봉투 4개를 버린 것은 지난 5월 27일. 범행 장소인 제주시 조천읍 펜션 인근 클린하우스에 1개, 이곳에서 약 500여m 떨어진 다른 클린하우스에 3개 등 총 4개의 쓰레기봉투를 버리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고유정이 쓰레기봉투를 버리는 모습은 지난 5월 30일 경찰이 확보한 클린하우스 폐쇄회로(CC)TV 영상에 담겨 있었는데, 문제는 이를 거의 한 달여가 지난 6월 24일에야 확인했다는 점이다. 이미 쓰레기봉투는 소각된 뒤라 정확한 유기물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실패한 것은 당연한 결과.
부검 등 전남편의 시신은 살인의 고의성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수사 증거지만, 이를 확보하지 못한 탓에 검색어 등으로만 ‘계획 살인’임을 강조해야 하는 상황이 된 셈이다. 고 씨는 이 빈틈을 노려 ‘우발성’을 주장한다.
고 씨 변호인은 카레에 넣었다고 검찰이 주장하는 “졸피뎀은 전남편이 먹지도 않았다”며 “이불 등에 묻은 혈흔에서 졸피뎀 반응이 나왔다고 하지만 이 혈흔은 고유정 씨가 피해자와 몸싸움을 하던 과정에서 묻은 고 씨의 혈흔”이라고 강조했다. 졸피뎀을 처방 받아 고유정이 먹었으며, 혈흔 역시 고 씨의 것이라며 고의성 반박에 나선 것. 또 “뼈의 무게는 현 남편 보양식으로 감자탕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꼬리곰탕, 뼈 분리수거, 뼈 강도 등으로 연관검색 상 자연스럽게 검색이 이뤄진 것”이라고 해명했다.
# 우발 범행 동기로 ‘겁탈’ 내세운 고유정
검찰이 공소사실을 밝히는 동안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기도 한 고유정. 야유가 쏟아졌지만 고유정 측 변호인은 “피해자가 고유정을 겁탈하려 했다”며 수사 당시부터 내세운 설명을 반복했다. 전남편이 ‘변태성욕자’였다며 “피해자(전남편)가 설거지를 하는 평화로운 전아내의 뒷모습에서 옛날 추억을 떠올렸고, 자신의 무리한 성적 요구를 피고인이 거부하지 않았던 과거를 기대했던 것이 비극(살해)을 낳게 된 단초”라고 강변했다.
피해자(전남편) 측이 명예훼손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고, 네티즌들도 고유정 변호를 맡은 변호인들에 대한 비난으로 확산됐다. 그리고 그 화살은 고유정의 변호를 맡은 남윤국 변호사를 향했다. 블로그에 3000개가 넘는 비난 댓글이 달렸는데, 이보다 앞선 지난달 초에는 변호인단 5명이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고유정을 왜 변호하느냐”는 비난 여론이 일자 언론 보도 하루 만에 모두 사임하기도 했다.
사진=YTN 뉴스화면 캡처
법조계에서는 변호사의 합법적 변호 행위에 대한 여론재판식 비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런 국민적 공분을 받은 사건의 피고인을 변호한 적이 있는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는 “피고인을 만나보니, 잘못은 잘못이지만 일부 사실이나 정황들이 더 나쁜 것처럼 포장되어 있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 변호를 맡았는데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항의와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며 “피고인이 아무리 나쁜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1심 선고가 나기 전까지는 무죄 추정의 원칙으로 변호를 받은 게 맞는데 국민들이 변호사까지 찾아가며 비난하는 것은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원칙에 부합하는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실제 남 변호사는 13일 오후 자신의 블로그에 ‘형사사건 변호와 관련한 입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남 변호사는 입장문에서 “변호사는 기본적인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하며, 그 사명에 따라 성실히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며 “언론에서 지금까지 보도된 바와 달리 그 사건에는 안타까운 진실이 있다. 변호사로서 그 사명을 다해 피고인이 공정한 재판을 받고 그 재판 속에서 이 사건의 진실이 외면 받지 않도록 성실히 제 직무를 수행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뉘우침’이 없는 전략을 선택한 고유정의 상황을 감안할 때, 결국 양형이 관건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검찰이 주장하는 대로 극단적 인명경시 살인의 경우 징역 23년 이상 무기징역까지 선고가 가능하지만, 과실로 인해 사람이 죽었을 경우 징역 2~3년이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부부싸움 중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했다고 자수하거나 뉘우치면 징역 2~3년이 나오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폭행 등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집행유예가 나오기도 한다”며 “시신 훼손 및 유기 혐의가 있어 고유정이 집행유예를 받기는 어렵겠지만 겁탈 과정에서 거부하다가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징역 5년 안팎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지만 애초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법원이 ‘계획 살인’이라는 검찰 주장을 받아들이면 무기징역이 나오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예측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