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봉오동 전투’에 출연한 키타무라 카즈키(왼쪽), 이케우치 히로유키, 다이고 코타로
반면, 한국에서는 일본 유명 배우의 이와 같은 행보에 다른 의미로 주목하고 있다. 이들이 단순한 한일 합작 영화나 로맨스 드라마 등을 위주로 출연해 오던 장르적 한계에서 벗어나 기존에 터부시되던 장르에까지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8월 7일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에는 세 명의 일본 배우가 출연한다. 드라마 ‘시그널’의 일본 리메이크판 ‘시그널: 장기 미제 사건 수사반’에서 이재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키타무라 카즈키(50), 영화 ‘엽문’에서 미우라 장군 역으로 열연을 펼쳤던 이케우치 히로유키(43), 곧 국내 개봉을 앞둔 영화 ‘날씨의 아이’에서 주연을 맡은 다이고 코타로(19)가 그 주인공이다. 각각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투입된 일본군 월강추격대의 대장 야스카와 지로, 그의 오른팔인 쿠사나기 중위와 소년병 유키오 역을 맡았다.
이 가운데 일본 내에서도 국민 배우로 꼽히는 키타무라 카즈키의 출연이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지난 5월 일본의 언론 ‘주간신쵸’는 키타무라 카즈키를 저격해 “일본인이 완전히 나쁜 모습으로 그려져 만행의 끝을 다한 반일 영화에 출연을 결정했다”고 지적했다. 오는 9월 NHK 아침 드라마 ‘스칼렛’에서 여주인공의 아버지 역으로 출연이 예정돼 있는 거물급 배우가 ‘매국노’ 낙인이 찍힐 수 있는 영화에 출연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논리다.
영화 ‘봉오동전투’ 스틸컷
실제로 일본 내 키타무라를 향한 여론은 좋지만은 않다. “일본의 유명 배우가 사실 관계도 명확하지 않은 반일영화에 출연함으로써 마치 일본이 그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돼 버렸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일본 국민들을 적으로 돌릴 각오가 돼 있는가” “배우로서 긍지는 있겠지만 일본인으로서 긍지는 없는 것 같다” “(키타무라가 광고 모델인) 기린 맥주를 마시지 않겠다. (출연이 예정된) NHK의 수신료가 반일 배우에게 흘러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다” 등 날선 반응이 주를 이뤘다. 특히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인해 한일 양국 간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기 시작하면서 키타무라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더욱 득세하기 시작했다.
‘봉오동 전투’의 제작진도 이런 반응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다. 원신연 감독은 지난달 29일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역사적 실화를 근거로 한 영화의 일본인 캐릭터를 일본인 배우가 연기한다는 것만으로 상당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걱정이 있었다”라며 “그래서 조심스럽게 제의했는데 많은 분들이 출연 의사를 전해 오셔서 제가 상당히 놀랐다”고 밝혔다. 실제로 키타무라의 경우는 그의 소속사에서 출연을 만류했으나 배우 본인이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유명 배우들이 항일 영화에 악역으로 출연한다는 소식이 개봉 전부터 알려지면서, 배우들의 불이익을 우려해 홍보에서 일본 배우들의 비중을 줄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예고편에서 일본 배우들의 등장이 적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홍보팀의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쿠사나기 역의 이케우치 히로유키가 개봉일 다음날인 지난 8일 직접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촬영 당시 사진을 올리고 개봉을 축하하는 모습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영화 ‘봉오동전투’에서 쿠사나기 역을 맡은 일본 배우 이케우치 히로유키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영화 개봉을 축하하는 글을 올렸다. 사진=이케우치 히로유키 SNS 캡처
이처럼 일본 배우들이 자국 여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태도를 보인 데에 업계 관계자들은 “일본 내 한국 영화에 대한 시각의 변화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영화사 관계자는 “1~2차 한류 열풍이 불었던 때에도 일본 내에서 한국 영화는 그저 ‘아시아 영화’나 ‘B급 영화’ 로만 분류됐었다”며 “일본 배우들이 출연을 하더라도 주로 한일합작 영화나 로맨스를 다루는 가벼운 상업영화가 많았고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큰 관심은 끌지 못했다. 일본 배우가 출연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영화를 봐야 할 메리트가 관객들에겐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일본 영화계의 변화를 지난 2016년 개봉한 영화 ‘곡성’에서 찾기도 했다. 항일 영화 그 이상으로 일본인에 대해 부정적인 상징이 덧씌워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열연을 펼친 쿠니무라 준에 대한 한국의 뜨거운 관심이 일본에 역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곡성’에서 외지인으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줬던 쿠니무라는 이를 통해 생애 첫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자국 영화가 아닌 해외 영화로, 그간 8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처음으로 칸 영화제에 가게 됐다는 사실에 일본의 영화계도 주목했다는 것이다. 쿠니무라는 또 2016년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해 외국인 배우 최초 청룡영화상의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케우치 히로유키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봉오동 전투’ 출연진과의 사진. 좌측 두 번째가 키타무라 카즈키, 우측 흰 패딩점퍼가 이케우치 히로유키. 사진=이케우치 히로유키 인스타그램 캡처
앞선 관계자는 “일본의 영화 산업은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의 실사 영화, 아이돌이 등장하는 상업 영화 외에는 대부분 침체 분위기”라고 짚었다. 실제로 지난해 ‘어느 가족’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일본 영화는 대규모 예산을 들여서 대박을 노리는 작품이나, 예산을 철저히 억누른 작은 작품의 양극화가 이뤄지고 있다”며 오리지널 기획 영화의 제작이 어려운 현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 관계자는이어 “제작자들은 여전히 영화다운 영화에 목이 말라 있지만 자국 내 제작이나 투자 상황이 여의치 않다. 그러다 보니 다수의 감독들은 투자를 받기 위해 프랑스 등으로 향하고, 배우들은 중국이나 한국으로 시선을 돌린 지 오래됐으며 일본 영화계가 가장 우려하는 점도 이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이런 현실로 인해 한국의 작품에 일본 배우가 캐스팅됐다는 것이 단순히 ‘그들만의 리그’를 벗어나 일본 영화계의 촉각을 곤두서게 하고 있다”며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한, 최근 한일 관계 냉각으로 일본 내에서 예상 이상의 거친 반응이 나오고 있긴 하나 일본 배우들이 한국 영화 출연을 선택하는 행보에는 큰 타격이 없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