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대망론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분기점은 한·일 갈등의 변곡점인 오는 9∼10월이다. 이 총리가 한일 전쟁의 해결사 역할을 한 뒤 총리직을 넘긴다는 게 핵심이다. 후임 총리가 11∼12월께 결정되면, 이 총리는 87년 체제 이후 최장수 총리 반열에 오른다. 이낙연 브랜드를 만들고 여의도로 귀환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낙연 대망론이 부상할수록 ‘경계론’도 증폭된다. 포스트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대망론의 벽이 될 수도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7월 11일 국회 본회의에서 열린 교육·사회·문화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답변하기 위해 단상으로 나가고 있다.
여권에 따르면 이 총리는 유엔 총회(미국 뉴욕, 9월 24∼30일)와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10월 22일)에 각각 참석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74주년 8·15 광복절을 기점으로 오는 10월 일왕 즉위식까지는 한·일 전쟁의 최대 고비로 꼽힌다. 애초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 참석할 것으로 전망됐지만, 정부 안팎에선 이 총리 가능성을 높게 본다.
이 총리는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과 한·일 의원연맹 수석부회장 등을 지냈던 대표적인 지일파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도 친분이 있다. 청와대가 ‘한·일 전쟁의 연착륙을 막으라’는 특명을 이 총리에게 내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헤이세이(平成)에서 레이와(令和)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최악인 한·일 관계를 봉합하는 첫 번째 총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른바 이낙연 ‘쇼타임’의 시작이다.
특히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일본 정부의 화이트 리스트(백색국가) 한국 배제를 앞둔 지난 7월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일본 국가안보국장과 담판을 벌였지만, 끝내 실패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낙연 역할론은 한층 커졌다. 앞서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8월 2일 브리핑에서 “7월에 정부 고위급 인사의 파견이 두 차례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중 한 명은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용·조세영’은 이 총리와 함께 대일 외교의 핵심 3인방으로 꼽힌다.
정부 관계자는 이 총리의 일왕 즉위식 참석 여부에 관해 “확정된 것은 없다”고 말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이 총리를 ‘투톱 외교’의 축이라고 밝힌 만큼 하반기 외교 일정 중 일부를 분담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문 대통령은 7월 16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총리 순방외교를 투톱 외교라는 적극적인 관점으로 봐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일 갈등 국면인 당시 정부 대표로 4개국(방글라데시·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카타르) 순방 길에 오른 이 총리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며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총리는 문 대통령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한·중·일 정상회의(태국 방콕, 11월 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칠레 산티아고 11월 16∼17일),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부산, 11월 25∼26일)를 제외한 유엔 총회와 일왕 즉위식 참석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차기 대권주자로 지목받는) 이 총리가 정부 일원이 아닌 다시 정치인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평가했다. 수비수 역할에 그쳤던 총리에서 해결사 면모를 드러낼 경우 명실상부한 차기 대권주자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총리가 유엔 총회에 참석한 전례는 김대중(DJ) 때인 2002년 이한동 전 총리와 이명박(MB) 정부 때인 2008년 한승수 전 총리 등이 전부다. 이번 유엔 총회에는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대신해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리 외무상은 2016년부터 매년 유엔 총회에 참석, 김 위원장 입장을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의 참석도 예정, 이 총리가 한·일뿐 아니라 북·미 중재자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유엔 총회보다 더 관심이 집중되는 외교 행보는 일왕 즉위식 참석이다. 미·중에서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왕치산(王岐山) 국가 부주석의 참석을 일본 정부에 각각 통보했다. 정부가 총리보다 낮은 급을 축하 사절단으로 보낼 경우 외교적 마찰을 빚을 수 있는 만큼, 이 총리의 참석이 유력하다.
1990년 아키히토(明仁) 상왕(나루히토 일왕의 부친)의 즉위식 당시 노태우 정부에서는 강영훈 전 총리를 보냈다. 미·중에서는 퀘일 전 부통령과 우쉐첸(吳學謙) 전 부총리가 각각 참석했다. 아베 총리 부부가 일왕 즉위식 다음 날(10월 23일) 정상 만찬을 개최, 이 총리는 대일 특사 역할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간 국내뿐 아니라 일본 내부에서도 지일파인 이 총리의 대일 특사 역할론을 제기했었다.
하반기 외교 정국에서 이 총리가 해결사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면, 포스트 DJ 후계자에 바짝 다가선다. 10월 말 이후 여의도로 복귀하면, 대통령 직선제 이후 최장수였던 김황식 전 총리(약 2년 5개월) 기록을 갈아치운다. 여권 한 관계자는 “무시 못 할 기록”이라고 잘라 말했다.
친문계 일색인 판에서 색채가 약한 이 총리는 출범 이후 줄곧 문 대통령과의 환상적 조화를 보여줬다. 사이다 발언과 뛰어난 정무 감각, 빠른 집행력 등도 갖췄다. 친문 지지층이 당 주류와는 거리가 있는 이 총리를 포스트로 지목하는 것도 이낙연 대망론의 핵심 축이다. 문 대통령을 ‘이니’로 부르는 친문 지지층 사이에선 이 총리는 ‘여니’로 통한다. 비문(비문재인)계 인사는 “중도 확장성은 이 총리의 최대 장점”이라고 전했다.
관전 포인트는 외교 피날레 이후 이 총리의 행보다. 이 총리는 여권의 플랜인 PK(부산·울산·경남) 총리 퍼즐이 맞춰지는 대로 당으로 돌아올 것으로 보인다. 다만 8·9 개각 때 이 총리가 빠졌던 이유인 ‘PK 인물난’이 장기화한다면, 예상보다 유임이 길어질 수도 있다. 이 경우 BH는 호남의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과 경제통인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을 두고 차기 총리 퍼즐 맞추기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 총리는 그간 향후 행보와 관련해 ‘선당후사’를 강조하며 “당이 부르는 대로 갈 것”이라고 밝혔다. 당 내부에선 ‘총선 출마’와 ‘공동 선거대책위원장’ 등으로 갈린다. 다만 측근들 사이에선 선대위원장을 맡아 전국적 선거를 이끄는 안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거듭난 이 총리가 서울 종로판 등에 뛰어들 경우 대권 잠룡 간 경쟁이 과열될 수 있는 데다, 이 과정에서 치명상을 얻을 경우 ‘본전도 못 찾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어서다. 현재 서울 종로는 현역인 정세균 민주당 의원과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출발선에 선 상태다.
공동 선대위원장 역할로 사실상의 차기 대선 운동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도 ‘총선 불출마설’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제1당을 사수한다면, 이 총리는 총선 승리의 키맨으로 급부상한다. 차기 대선 직행 가능성이 한층 커지면서 총선을 기점으로 이낙연계가 탄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군계일학인 대중성에다가, 당내 조직력까지 갖춰지는 셈이다.
만에 하나 이 총리가 총선 출마로 가닥을 잡는다면, 서울 종로를 포함, PK 등 험지에 도전장을 던질 것으로 보인다. 임 전 실장 등과는 달리, 이 총리에게 오는 2022년 대선은 사실상 마지막 도전의 무대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소장은 “마지막 도전자 입장에선 사지가 아닌 안정권으로 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종로 탈환이든 제1당 사수든, 20대 대선은 피할 수 없는 진검승부다. 예선전 벽은 ‘호남 후보 필패론’이다. 정세균 의원이나 민주평화당 대표인 정동영 의원 등도 모두 이 벽을 넘지 못했다. 정계 은퇴 번복 끝에 도전한 DJ도 유신의 축이었던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호남·충청 연합을 통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권교체를 꾀했다. 친문계 핵심 관계자는 “이 총리가 그 벽을 넘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PK 친문계가 영남 후보 필승론을 앞세워 이 총리를 흔드는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도 있다. DJ 후계자 이미지가 예선전의 벽이라면, 본선 변수는 ‘문심(문 대통령 의중)’이다. 앞서 2007년 대선 당시 여권 비주류가 ‘고건 대망론’을 띄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 전 총리를 ‘실패한 인사’로 치부하며 주저앉혔다. 노무현과 고건의 충돌 이면에는 친노계의 영남 후보 만들기를 위한 노림수가 깔렸다. 이 총리의 대권 승부처는 ‘포스트 DJ’와 ‘문 대통령’인 셈이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