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 감독은 지난 시즌 이후 근황에 대해 “축구 인생에서 가장 긴 휴식시간을 갖고 있다”며 웃었다.
[일요신문] 지난해 수원 삼성 블루윙즈 지휘봉을 내려놓은 서정원 감독이 오랜만에 팬들 앞에 나섰다. 지난 2018 시즌 마지막 경기를 이후로 수원에서 퇴단한 그는 이렇다 할 대외활동 없이 시간을 보내왔다. 스스로 “축구 인생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쉰 것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다. 축구 인생 중 가장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서정원 감독을 만나 그의 축구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 22일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서울 삼성동의 한 스튜디오였다. 절친한 축구계 선배이자 인터넷방송(아프리카TV, 유튜브)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이상윤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이 진행하는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서였다. 인터넷 생방송으로 팬들과 소통하며 뜻밖의 입담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는 “방송 출연 등의 활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오늘은 방송이라기보다 오랜만에 상윤이형 만나서 편하게 얘기한다는 생각으로 왔다. 그런데 상윤이형이 많이 변했다. 방송인 다됐다”며 웃어보였다.
대표팀 선배 이상윤 해설위원과 함께 인터넷방송 나들이에 나선 모습.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동양인문학 강의를 듣고 있다는 근황을 전했다. 외도처럼 보이지만 인문학 공부의 이유 또한 축구를 위해서였다. 일종의 ‘감독 공부’인 셈이다.
“앞으로도 지도자 생활을 할 텐데 감독이라는 일이 결국은 사람과 소통하는 일이다. 선수들과 소통하고 동기유발을 하는 면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어쩔 수 없는 축구인이다. 휴식을 취하며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 늘었지만 여전히 축구를 완전히 떠나서 지낼 수는 없다. 지난 4월엔 두 달간 유럽으로 떠나 현지에서 축구를 지켜봤다. 국내에선 고교, 대학 경기 현장을 다녔다.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아들 동한 군(매탄고 축구선수로 활동 중)의 경기도 봤다.
선수와 코치, 감독으로 13년의 세월을 보낸 팀 수원에 대한 관심도 여전하다. 그는 “시간만 허락한다면 꼭 경기를 본다. 한번은 경기장에도 몰래 갔다 왔다”면서 “팀을 향한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다. 선수들이 종종 집에 찾아와서 식사를 같이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학 후배이자 후임 감독인 이임생 감독에 대해서는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힘들어하는 모습도 종종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항상 응원하고 있다”고 했다.
#월드컵의 추억
서정원 감독은 선수 시절 국가대표팀에서 종횡무진했던 활약으로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남아있다. 그는 1990년대 내내 대표팀 한 축을 맡아 88경기에 나서 16골을 넣었다.
특히 1994 미국 월드컵에선 축구강국 스페인을 상대로 동점골을 뽑아내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골에 대해 “선수생활 중 기억에 남는 몇 골 중 하나다. 월드컵이라는 무대에서 넣은 골이었기에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됐다. 나중에 유럽에서 뛸 때도 이때 골을 떠올리며 자신 있게 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선 뜻밖의 사고를 겪었다. 예선 과정에선 그 유명한 ‘도쿄대첩’에서 동점골을 넣는 등 주축으로 맹활약했던 그다. 정작 본선 무대에선 크게 중용 받지 못했다. 그가 대회를 앞두고 수두를 앓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전설 에우제비우와의 추억. 1997년 벤피카 이적 작업 당시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사진=서정원 감독 제공
“출국 전에 외박을 받아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아들이 수두에 걸렸는데 접촉했다가 옮아버렸다. 대표팀에선 미국에서 약을 공수하고 난리가 났다. 프랑스로 갈 때 선수단과 격리돼 비행기 좌석을 따로 배정 받기도 했다(웃음). 출국 전부터 프랑스 현지에 도착해서도 운동을 전혀 못했다. 조별리그 첫 경기 직전에 겨우 몸 풀기 정도만 하고 경기를 뛰었다. 당시엔 아쉬웠지만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이다.”
서정원이 참가한 월드컵은 1994년과 1998년 대회뿐만이 아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도 예비 엔트리에 이름을 올려 대표팀과 동행했다. 그는 “그땐 예비 엔트리 선수들도 대회에 데리고 갔다. 현장에서 대회를 지켜보며 정말 큰 동기부여가 됐다. 나는 그 덕에 나중에 내가 월드컵에 나서는 선수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표팀도 그런 제도나 시스템이 생겼으면 좋겠다. 어린 선수들에게 정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2002 한일 월드컵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에도 대표팀에 뽑혔었다. 한동안 빠져 있다가 다시 호출이 됐는데 감독님이 경기에 내보내지는 않으셨다. 그러자 소속팀 감독님이 축구협회와 대표팀에 크게 항의를 하셨다. 나에게도 ‘대표팀 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 이후로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소속팀에 집중했다(웃음). 그때 대표팀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면 월드컵에 한 번 더 참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히딩크 감독도 월드컵 이후 출간한 자서전에서 ‘23인 최종 엔트리에 넣지 못해 아쉬웠던 선수’로 서정원 감독을 언급했던 바 있다.
선수생활 황혼기를 보내던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선 유럽에서 ‘서정원이 월드컵에 나가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가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치자 현지 팬들이 대표팀에 선발되지 않는 그를 의아하게 여긴 것이다. 서 감독은 당시를 떠올리며 “‘당신은 왜 대표팀에 뽑히지 않냐’는 질문을 받아서 ‘나보다 잘하는 선수 많다’며 웃어넘기곤 했다. 그땐 나이도 많았고 정말 욕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아픔으로 남은 해외 진출 무산
서 감독은 선수 시절 전성기를 보내던 1997년과 마무리를 준비하던 2005년 각각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로 진출해 축구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활약한 바 있다. 각 팀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었기에 국내에도 그의 활약상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외에도 그에겐 수차례 유럽 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결국 성사가 안됐기에 나에게 유럽 무대는 항상 꿈으로 남아있었다”고 회상했다.
첫 기회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이었다. 신태용, 노정윤, 이임생, 강철, 이운재 등으로 구성돼 강력한 전력을 자랑하던 당시 올림픽 대표팀에서도 서정원 감독은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선수였다. 조별리그 3차전에선 스웨덴을 상대로 선제골을 넣기도 했던 그였다.
많은 기대를 받았고 3경기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지만 무승부만 기록하며 조별리그에서 짐을 싸야했다. 하지만 서 감독 개인적으로는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회 탈락이 확정되고 허탈한 마음으로 로커룸에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기자들이 굉장히 많더라. 올림픽 자원봉사자로 우리 팀 통역을 해줬던 현지 유학생도 흥분 상태였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서정원 선수, 여기(스페인) 팀에서 스카우트하고 싶어 한대요’라고 외쳤다. 그 팀이 FC 바르셀로나였다.”
실제 접촉한 바르셀로나는 단순히 ‘관심이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야기가 오가면서 연봉 8억 등의 구체적인 조건까지 공개됐다. 하지만 당시 대학생이던 그는 병역 문제로 해외 팀과 섣불리 계약을 맺을 수 없었다.
상무에서 군복무를 마친 이후 1997년에는 포르투갈 명문 벤피카로 이적할 기회도 있었다. 실제 입단식 직전까지 절차가 진행됐다. 벤피카 팀에 합류해 유니폼도 받았고 선수단과 함께 단체 사진도 촬영했다. 연습경기까지 뛰었다. 하지만 이번엔 월드컵 지역 예선 참가를 반대했던 벤피카와 그가 꼭 필요했던 대표팀이 충돌하며 이적이 무산됐다.
“지금처럼 A매치 의무차출 조항 같은 것이 자리 잡히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포르투갈 전설 에우제비우와도 만났고 당시 팀에는 주앙 핀투, 누누 고메스 같은 유명 선수들도 있었다. 팀에서는 등번호 9번을 주며 나를 신뢰했었다. 입단이 무산된 게 너무 아쉬워서 당시 받은 유니폼, 단체복 등을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다(웃음). 또 다시 유럽 진출이 좌절되니 한이 맺히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현지에 있는 벤피카 역사관에 ‘구단에서 뛴 아시아 출신 선수’로 내 이름이 적혀있다더라. 참 아쉽다.”
1999년 프랑스에서 국내로 복귀하기 전에도 유럽생활을 이어갈 뻔했다. 독일 분데스리가 쾰른에서 그를 원했고 이적 작업이 성사 직전까지 진행됐다. 당시 독일 현지 언론에선 한글이 적힌 그의 이적 소식을 지면에 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이적료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지난 2018 시즌 마지막 경기. 수원 삼성 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서정원 감독.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외부적 요인으로 좌절을 겪고 ‘제자들만큼은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서 감독은 “수원 감독 시절, 시즌 시작 전에 항상 선수들을 불러 모아 ‘좋은 오퍼 있으면 무조건 보내 줄 테니 먼저 얘기하라’고 말했다. 팀이 어렵고 좋은 선수가 이적하면 더 힘들어지겠지만 선수 입장에선 기회가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그가 내보낸 선수 중 하나가 지금도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는 권창훈이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이상윤 해설위원은 “감독으로서 좋은 선수 다 내보내면 힘들다. 감독이 사는 게 우선 아닌가”라고 묻자 서 감독은 “내가 그래서 지금 감독을 못하고 여기 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현재는 축구 인생의 첫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는 “당연히 내가 있을 곳은 운동장”이라며 현장으로 돌아갈 계획을 밝혔다. 누구보다 다양한 경험을 했던 그가 앞으로는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 낼지 눈길이 쏠린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1994 미국 월드컵 스페인전에서 골을 넣고 환호하는 장면. 연합뉴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군인 신분으로 골을 넣어 화제를 낳았던 이근호 이전에 서정원 감독이 존재했다. 1994 미국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스페인전에 후반 교체 출전한 그는 오른쪽 측면에서 홍명보 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의 패스를 받아 오른발 슈팅을 날렸고 이는 곧장 골망을 흔들었다. 1-2로 뒤지던 후반 종료 직전, 축구강국 스페인을 상대로 넣은 골이라 더욱 극적이었다. 서정원 감독은 당시 국군체육부대(상무) 소속이라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서정원 감독은 그때를 떠올리며 자신 때문에 상무 선수들이 군기 교육을 받게 된 사연을 털어놨다. 그의 입대 시점은 월드컵(6월)을 눈앞에 둔 1994년 초였다. 그는 “머리 깎고 입대한 이후 하루 만에 다시 나와 대표팀에 합류했다”고 전했다. 당시 국내 축구는 대표팀 운영에 모든 것이 집중되던 시절이었다. 대표팀 선수는 프로리그도 불참하고 합숙 훈련을 이어가기도 했다. “하루 만에 다시 사회로 나왔으니 내가 군대에 대해 뭘 알겠나. 그런데 월드컵에서 군인 신분으로 골을 넣다보니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처음에 수화기에 대고 ‘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웃음). 그땐 군인이 어떤 말투를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 이후로 ‘상무 부대원 군기가 빠졌다’는 얘기가 나와 군기 교육을 받았다.” 군인 서정원의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월드컵을 치르고 난 후 남들보다 늦은 시점에 병기초군사훈련을 받게 됐다. “훈련소에 입소하니까 나는 이미 일병이 돼 있었다. 그건 큰 문제가 아닌데 월드컵 이후 인기가 올라간 상황이라 피곤한 점이 많았다. 내무반에 들어오는 상관마다 빠지지 않고 나를 불러 세웠다. 관등성명을 하도 많이 대서 지금도 ‘269번 훈련병 서정원’이 잊히지 않는다. 불러 세운 이후에는 데려가서 커피를 마셨다. 그땐 안 먹던 커피를 하루에 몇 잔씩 들이켜니 밤에 잠이 안 오더라.” 이어 서 감독은 “물론 대표팀 생활을 지속하며 군대보다는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기에 편한 점도 있었다. 고생하며 나라 지키는 다른 분들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그때 내 나름대로 피곤한 일들이 많았다”며 웃었다. 상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신분이었다. 월드컵 이후 높아진 대중들에 관심에 외부 행사에도 많이 불려 갔다. 그는 “방송 섭외가 들어와서 부대에서 나가라고 하면 안 내켜도 거부할 수 없었다. 월드컵 이후 대표팀을 다루는 모든 방송에 군복입고 다 나갔다. ‘가요톱텐’에도 나가서 상을 받았다. ‘94년도를 빛낸 스포츠인 상’이었나. 아직 집에 보관하고 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김상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