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해인.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20~30대 배우가 가장 많이 소화하는 장르가 멜로와 로맨스라고 해도, 정해인을 둘러싼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멜로에서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는 감독, 배우들과의 작업을 통해 그 역시 실력을 늘리고 있다. ‘멜로 장인’이란 평가가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정해인 역시 일련의 평가와 반응에 대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수긍했다. 누군가를 사랑한 경험이 많아서는 아니다. 자신의 연기력을 스스로 높이 사는 건 더더욱 아니다. 멜로 장르의 작품을 할 때면 정해인은 상대역이 누구든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했다. 촬영하는 기간에는 상대 연기자에 온전히 빠져들어 살아간다. 숱한 멜로드라마와 영화가 나오고 있지만 이에 참여하는 배우들 모두가 실천하기는 어려운 ‘진리’를 그는 매번 실천하고 있다.
# “멜로 실력 늘도록 도운 배우는 손예진”
‘유열의 음악앨범’ 개봉을 준비하는 정해인을 8월 22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미리 촬영해 둔 사진을 제공받기로 한 만큼 편안한 차림으로 인터뷰 장소에 나타날 거라고 예상했지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정해인의 옷차림은 반전 그 자체였다. 검은색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검은색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맨 채였다. 시상식이라도 가야할 듯한 차림의 그는 “인터뷰에 임하는 마음을 옷으로라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배우 정해인.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정해인은 지난해 배우 손예진과 주연한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말초신경 자극하는 사랑이야기가 아닌, 섬세한 감정으로 쌓아가는 감성 멜로를 완성했다. 뒤이어 올해 초 한지민과 선보인 MBC 드라마 ‘봄날’을 통해서는 과거 상처를 가진 미혼부 역을 맡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상황을 그려내며 배우로 정점에 올랐다. 그렇게 정해인은 멜로에 관한 한 현재 가장 돋보이는 실력자가 됐다.
이번에 내놓은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정해인의 진기가 발휘되는 작품. 김고은과 더불어 1994년 시작해 1997년과 2000년 그리고 2005년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관통하면서 10년에 걸친 운명의 사랑을 그린다. 정해인은 “얼마 전 ‘봄밤’을 찍으면서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배웠다”고 했다.
“원래 저는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에요. 어렵죠. 그래도 먼저 용기를 내야했어요. 먼저 용기 내 다가가 배려하고 존중하면 상대도 나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좋은 호흡이 나와요. 영화를 함께한 김고은과 그런 면에서 서로 성격이나 성향이 맞았어요. 상대를 먼저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둘 다 확고했거든요.”
정해인은 지금처럼 멜로에서 실력을 쌓을 수 있게 된 발판은 손예진이 마련해줬다고 꼽았다. 함께 드라마를 찍으면서 노련한 선배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습득했다는 이야기다. 그는 “멜로 경험도 없는데다 주연도 처음이라서 엄청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걸 손예진 선배님이 바로 이해하고 잘 받아줘서 마음껏 표현할 수 있었다”며 “마냥 어려워하고, 넓은 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으면 배우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결론도 내렸다”고 했다.
배우 정해인.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 정해인의 사랑법…오래도록, 신중하게
드라마와 영화에서 숱한 사랑을 그리고 있는 정해인은 실제 사랑할 때는 “오래 지켜보는 편”이라고 했다. 끈기 있게, 묵묵하게 바라보고 관계를 이어간다는 설명이다. 그런 면에서 그동안 연기한 작품 속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간혹 말 못 할 비밀이 생긴다면, 정해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를 숨김없이 털어놓겠다고 말했다. 나의 고민, 나의 상처를 다른 사람의 입이 아닌 직접 사랑하는 사람에게 꺼내는 게 “예의이고 신뢰”라고 했다. 진중한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간혹 마음에 드는 옷이 생기면 주구장창 그 옷만 입어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8, 9년간 버리지 않고 계속 입은 옷들이 몇 벌 있어요. 사람을 만나 사귈 때도 마찬가지에요. 꼭 사랑하는 사람 뿐 아니라, 누군가를 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인연을 맞으면 길게 가는 편이죠.”
지금은 남부러울 것 없는 스타 배우가 됐고, 여기저기서 그를 캐스팅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는 데다, 광고모델로도 몸값이 높은 정해인이지만 7~8년 전 막 데뷔하고 나서는 “서러움도 많아 겪었다”고 돌이켰다. 오디션에 수 없이 응시해 탈락했고, 절박한 마음에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매달린 때도 있었다. 성큼 성장한 지금은 “주연배우로서의 책임감”이 그를 누르고 있다. 남모를 부담이 커서일까. 정해인은 “불과 얼마 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 큰 고통이 왔다”고 고백했다.
“많이 아팠어요. 일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죠. 지금은 회복됐지만 연기자라는 직업이 사랑을 많이 받아 행복하긴 해도, 그만큼 정신적으로 불완전할 때가 많아요.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자존감이 낮은 것만큼 슬픈 일도 없는 것 같아요. 제 꿈은 건강하게 오래 연기하는 거예요.”
정해인은 7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다. “삼겹살에 소주한잔 하면서 인생 얘기하는 친구이자 동생”이라고 했다. “제가 스무 살 땐 동생이 초등학생이라 대화 자체가 안됐는데 동생도 군대에 다녀와서인지 남자 대 남자로 느껴진다”는 정해인은 “내 고민을 가장 많이 들어주고 힘을 불어넣어주는, 그러면서도 쓴소리도 제일 많이 하는 존재”라고 했다.
“동생과 얼마 전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어요. 제가 번 돈으로 직접 호텔 숙박비를 결제한 게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 뭔가 뭉클하고 새롭더라고요. 오랫동안 가족 여행을 가지 않았는데 꼭 부모님과 여행을 갈 생각이에요. 그게 올해 제가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입니다. 하하!”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