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과 대법관들이 8월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 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 농단’ 사건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개정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 대법 “박 전 대통령 뇌물 혐의 분리해 판단해야”
항소심에서 징역 25년과 벌금 200억 원을 선고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 하지만 8월 2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김명수 대법원장)는 구체적인 유무죄 판단을 뒤집는 대신 양형 판단을 잘못했다고 지적했다.
공직선거법은 대통령 등 공직자에게 적용된 특정범죄 가중처벌에 관한 법률상 뇌물 혐의를 다른 범죄 혐의와 분리해 선고하도록 정하고 있다. 공직자의 뇌물죄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 제한과 관련되기 때문에 반드시 분리해 선고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박 전 대통령 2심 재판부는 지난해 8월 선고에서 특가법상 뇌물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강요, 강요미수,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 등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면서 징역 25년과 벌금 200억 원을 선고했고 이때 주문에서 뇌물 혐의와 다른 혐의를 분리하지 않았다.
이를 문제 삼은 건 대법원이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원심(2심)이 특가법상 뇌물죄와 다른 죄에 대해 형법 38조를 적용해 하나의 선고를 했다. 이는 공직선거법 18조 제3항을 위반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며 원심 파기를 결정했다. 그러면서도 무죄 판단을 받은 부분에 대해서는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확정했다.
큰 틀에서 유무죄 판단이 바뀌지 않은 채 유죄가 인정된 뇌물 혐의에 대해서만 ‘양형’을 따로 선고받게 된 것. 보통 범죄 혐의를 한데 묶어 선고하지 않고 분리 선고할 경우 형량이 높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박 전 대통령 역시 2심(징역 25년)보다 더 높은 양형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대목이다.
윤석열 검찰총장도 판결 선고 직후 대검찰청 대변인실을 거쳐 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앞으로 진행될 파기환송심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 책임자들이 최종적으로 죄에 상응하는 형을 선고받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박 전 대통령이 상고도 하지 않는 등 일절 재판에 응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지 않냐”며 “분리 선고의 경우 각 범죄 혐의의 형량의 권고 기준을 따로 판단한 뒤 이를 합쳐 총 형량이 정해지기 때문에 보통 처벌이 가중되곤 한다. 법의 취지도 그런 목적이기 때문에 박 전 대통령도 양형이 올라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 한동안 잠잠할 수밖에 없어진 ‘사면’ 카드
대법원의 이번 파기환송 결정으로 박 전 대통령 조기 사면론은 한동안 나오기 힘들어졌다. 대법원의 확정 선고 이후에나 대통령이 사면 여부를 고민할 수 있는데 파기환송심·재상고심까지의 일정을 감안할 때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나경원 원내대표 등 한국당 지도부에서 요구해 온 박 전 대통령 조기 사면은 최소 6개월 후에나 가능해졌다는 얘기다.
법원 관계자는 “통상 파기환송심의 경우 유무죄 판단이 이미 내려진 경우 양형만 결정하면 되기 때문에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는다”면서도 “검찰에서는 어떤 형이 나오더라도 재상고를 할 확률이 높고 그럴 경우 못해도 확정까지 6개월 안팎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현재 미결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박 전 대통령은 유영하 변호사가 주 1~2회 접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 측에서는 이번 선고를 앞두고 “이대로 형이 확정되면 12월 사면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기대감이 적지 않았다. 유영하 변호사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여러 차례 언급해 왔던 만큼 ‘겨울은 밖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 파기환송 결정으로 ‘크리스마스 사면’은 물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사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건의 경우 정치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법리나 양형이 큰 의미가 없다. 언제 국민 통합 차원에서 사면을 하느냐가 관건”이라며 “결국 형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면 얘기는 나올 수 없게 됐다”고 설명했다.
# 고민 더 깊어진 이재용 부회장…말 3마리에 ‘덜미’
‘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보다 ‘풀려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고민은 더 깊다. 똑같이 파기환송 선고를 받았지만, 무죄였던 부분이 ‘유죄’가 돼 재판을 받게 됐다. 삼성 측이 최순실에게 제공한 뇌물 혐의 관련, 딸 정유라에게 제공한 살시도 등 말 3마리에 덜미가 잡혔다.
사실 8월 29일 대법원 선고의 핵심 쟁점은 △삼성이 제공한 ‘살시도 등 말 세 마리’가 최순실의 것인지 △삼성이 대가를 바라고 준 뇌물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판단이었다. 앞서 항소심(2심)은 삼성 측이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게 제공한 말 구입비 등이 뇌물이 아니라고 봤기 때문. 소유권은 삼성에 있으며 정유라는 이를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판단이었다. 덕분에 이재용 부회장은 실형이 선고된 1심보다 감형된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엄격했다. 34억 원 상당(구매액 기준)의 ‘말 세 마리’가 ‘최순실에게 소유권이 있었다’고 판결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선고에서 “말의 실질적인 사용 처분은 최순실에게 있었다”며 그 근거로 “삼성 측과 최순실이 두 차례 회의를 해서 범행을 숨기려 할 때도 최순실에게 말의 권한이 귀속되는 것으로 얘기가 오갔으며 말들을 임의로 처분하거나 죽고 다치더라도 삼성전자에 손해를 물어줄 필요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대가를 바라고 준 뇌물이라는 점도 확정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명시적인 의사 표시가 없었다고 하지만 당시 삼성은 최소비용으로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등 계열사에 대한 이재용 지분 강화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승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이익과 뇌물 사이 대가관계를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특정됐다”며 최순실에게 준 말 3마리는 ‘뇌물’이라고 판단했다.
최순실이 설립한 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지원된 16억 원도 판단이 바뀌었다. 2심 재판부는 경영권 승계 작업이라는 현안이 없었다고 판단하며 이 부회장이 부정한 청탁을 할 일도 없었다고 보고 무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승계를 위한 부정한 청탁에 해당한다’며 이마저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2심에서 뇌물액이 36억 원이었던 게 파기 환송심에서는 86억 원(말 3마리 34억 원 + 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 16억 원)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양형에는 매우 불리한 변화다. 앞서 2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의 뇌물 공여액 중 36억 원만 인정하며 ‘이 부회장이 정치권력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뇌물을 제공했다’는 유리한 양형 요소와 함께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뇌물 공여액이 86억 원으로 늘어난 파기 환송심에서는 5년 이상의 형이 권고 기준이다. 횡령액이 50억 원 이상일 경우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최저 징역 5년 이상이 적용되기 때문. 집행유예는 선고형이 징역 3년 이하인 경우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재판부가 직권으로 감형(권고 기준의 절반까지 감형 가능)하지 않으면 집행유예조차 받을 수 없다.
법원 고위직 관계자는 “이제 와 보건대 삼성에 가장 유리한 대목은 2심 재판부가 징역 3년이 아니라 징역 2년 6월을 선고하며 집행유예(4년)를 줬다는 점”이라며 “유죄가 된 항목이 늘어난 상황에서 삼성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라는, 2심보다는 늘어났지만 집행유예를 파기환송심에서 선고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론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1심, 2심을 거쳐 대법원에서 이미 법리적으로 다툴 부분을 모두 다툰 뒤, 유무죄 판단까지 받았기 때문. 서울고등법원 형사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통상 대법원이 유무죄 판단을 끝낸 파기환송심에서는 유죄를 전제로 양형만 결정하면 되기 때문에 첫 재판에 바로 선고를 할 수도 있다”며 “늦어도 2~3달 안에 결론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은 대기업 총수 ‘전용’ 형량?
징역 3년이라는 ‘집행유예 가능 최대형량’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것은 사실 대기업 총수들 재판에서 종종 등장하던 법칙이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에는 조양호 한진 회장이 탈세 혐의로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이 선고받았다. 지난 2003년에는 최태원 SK 회장과 2006년 박용성 두산 회장이 각각 배임과 횡령 혐의로 기소됐는데, 이들은 모두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으로 풀려났고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이명박 정부 당시인 2008년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2009년 이건희 삼성 회장은 횡령 등 기업 범죄로 기소됐으나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지난 2014년에도 회사에 수천억 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를 받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1심과 2심 모두 실형을 받았다가 파기환송심까지 가는 과정 끝에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난 바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라는 ‘3·5법칙’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앞서의 법원 고위직 관계자는 “대법원이 유무죄 판단을 다 해줬지만 결국 양형은 파기환송심 재판장이 하는 것”이라며 “파기환송심 재판장이 각종 경제 상황 등을 감안해 이 부회장에 대한 감형 사유를 얼마나 인정해주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마냥 ‘집행유예’를 주기는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다른 법원 관계자는 “권고 기준 최저가 징역 5년인데 이를 깨가면서 징역 3년을 주는 것은 ‘봐주기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상세한 사건 내용을 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재판장이라면 쉽게 집행유예를 결정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첨언했다.
삼성전자는 향후 재판을 고려한 듯한 입장을 내놨다. 판결 후 입장문에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송구스럽다”며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삼성은 ‘입장문을 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는 추가 입장을 통해 “현재 삼성 내부에서 느끼는 위기감은 바깥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해 ‘위기를 돌파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현재 삼성은 사기가 저하된 가운데 실적 악화, 일본 수출 규제, 미중무역 갈등 격화 등이 겹치는 ‘퍼펙트 스톰’에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사와 압수수색으로 오너와 경영진, 임직원들 모두가 위축돼 있다”고 토로했다.
이재용 부회장 측 변호인인 법무법인 태평양 이인재 대표변호사 역시 “대법원이 대통령의 요구에 따른 금품 지원에 대해 뇌물공여죄를 인정한 것은 다소 아쉽다고 생각된다”면서도 “형이 가장 무거운 재산국외도피죄와 뇌물 액수가 가장 큰 재단 관련 뇌물죄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고, 삼성은 어떠한 특혜를 취득하지도 않았음을 법원이 인정했다”고 입장을 내놓았다.
파기 환송심을 앞두고, 이 부회장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려 한다는 해석이 나오는 대목이다.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는 “결국 이제 양형만 남은 상황에서 전 세계적인 경제 상황이 좋지 않고, 오너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집행유예를 끌어내려는 전략적인 판단이 아니겠냐”며 “실제 이번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삼성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다양한 루트를 통해 미리 대비를 했다, 선고 후 입장 역시 파기 환송심까지 내다본 포석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