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항소심 선고공판을 위해 서울고등법원에 출석하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고성준 기자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29일 열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관련 상고심에서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 원심 판결을 뒤집고 파기환송했다. 앞서 이재용 부회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등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법정구속됐지만,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으로 감형돼 풀려났다.
2심에서 형량이 준 이유는 크게 3가지다. 먼저 2심은 삼성이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에게 제공한 말 3마리를 뇌물액에 포함할 수 없다고 판단, 이재용 부회장이 이에 해당하는 회사 돈 34억 원에 대한 횡령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서 이재용 부회장으로 ‘경영권 승계’라는 현안이 없었다고 보고 삼성이 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지원한 16억 원을 제3자 뇌물로 보지 않아 혐의 없음 판단했다. 삼성이 최순실 씨에게 송금한 78억여 원에 대해서도 도피에 해당하지 않고 범죄의 고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재산국외도피 혐의 역시 무죄로 판단했다. 그 결과 1심의 72억 원이었던 이 부회장의 뇌물·횡령액수는 2심에서 36억 원으로 줄었고, 이재용 부회장은 집행유예로 석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2심이 판단한 무혐의 3가지 중 2건에 대해 혐의가 있다고 뒤집었다. 특히 대법원은 삼성의 경영권 승계 현안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청탁 대상과 내용이 구체적일 필요는 없고, 그에 대한 인식은 미필적인 것으로도 충분하다. 2심이 ‘부정청탁의 대상이 명확히 정의돼야 하고, 청탁도 명확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은 잘못”이라며 “최소 비용으로 삼성 계열사들이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에 대한 이재용의 지배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그룹 차원에서 조직적 승계작업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통령의 포괄적인 권한에 비춰 보면 영재센터 지원금은 대가관계의 여지가 있다고 보기 충분하다”며 삼성이 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지원한 16억 원을 제3자 뇌물이라고 판단했다. 또 삼성이 정유라 씨에게 제공한 말 3마리도 뇌물이라고 보고, 뇌물액수도 34억 원이라고 구체적으로 특정했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로 이재용 부회장에게 적용된 뇌물액수는 36억 원에서 86억 원으로 늘어났다. 2심 판결로 줄어든 뇌물액과 횡령액에 대해 대법원이 다시 증액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리면서, 향후 진행될 파기환송심에서 이재용 부회장은 형량이 가중될 가능성이 커졌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죄는 횡령액이 50억 원 이상일 경우 5년 이상의 징역으로 처벌한다. 집행유예는 3년 이하의 징역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재용 부회장은 원칙적으로 집행유예가 불가능한 형량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작량감경 등으로 집행유예를 받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전경. 고성준 기자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이재용 부회장 측 변호인단의 이인재 법무법인 태평양 대표변호사는 “대법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요구에 따른 금품 지원에 대해 뇌물공여죄를 인정한 것은 다소 아쉽다”면서도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의미가 있다. 형이 가장 무거운 재산국외도피죄와 뇌물액수가 가장 큰 재단 관련 뇌물죄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또한 삼성은 어떠한 특혜도 취득하지 않았음을 인정하였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마필 자체를 뇌물로 인정한 것은 이미 원심에서도 마필의 무상사용을 뇌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사안의 본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동안 삼성그룹 오너 일가의 경영승계 문제점을 지적해온 이들은 대체로 이번 대법원 판결에 대해 기대했던 결과가 나왔다고 보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 정도면 판결이 잘 나왔다”며 “무죄 확정된 재산국외도피죄나 재단 출연금 제3자 뇌물죄는 민변 등에서도 처음부터 성립하기가 법리적으로 무리 아니냐는 의견이 우세했다. 법이 개정돼야 하는 문제지, 현행법상으로는 해석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봤다”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또 이 부회장 변호인단 측의 ‘마필 뇌물 인정이 사안의 본질에 영향을 줄 요인이 아니다’라는 입장에 대해 “마필에 대한 뇌물이 인정되고 액수도 34억 원으로 특정되면서 뇌물·횡령액이 50억 원을 넘어 이재용 부회장이 실형 선고 가능성이 높아졌는데 왜 본질에 영향을 안 주겠는가. 변호인단의 자족적 희망사항이라고 본다”며 “오히려 이 메시지는 변호인단이 ‘할 만큼 했다’고 삼성 측에 보내는 면피성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이재용 부회장에게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 재계의 충격, 전혀 예상 못했나
이번 판결에 대해 삼성전자 측은 “그동안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삼성전자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겠다.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과 성원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삼성이 이재용 부회장의 수사·재판과 관련해 공식 입장을 내놓은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재계에서는 이재용 부회장의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앞서 2심 선고 자체가 논란이 많았으며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최순실 씨가 받은 판결과 배치되는 내용이 많아 어느 쪽이든 크게 뒤집어질 것으로 봤다”며 “삼성 내부적으로도 어느 정도 위기를 인지했기 때문에 이재용 부회장이 석방된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광폭행보를 보인 것 아니겠느냐”고 귀띔했다. 실제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해 2월 집행유예로 나온 이후 공식석상에 자주 모습을 비췄으며 삼성은 이례적으로 이 부회장의 행보를 일일이 공개해왔다. 일각에서는 대법원 판결과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조작 사건, 경영권 승계 문제에 대한 검찰 수사를 의식한 전략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한국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더욱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대법원의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판결을 존중한다”면서도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 미·중 무역전쟁 등 여러 가지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이번 판결로 경제계의 불확실성이 지속됨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수사 급물살 탈까
이번 대법원 선고로 검찰의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조작 사건 수사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바이오 회계조작 사건으로 시작된 검찰 수사는 현재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 문제로 번졌다. 삼성전자 사업지원TF 임직원들이 증거인멸 혐의 등으로 구속됐고, ‘이 부회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정현호 삼성전자 사업지원TF 사장도 지난 6월 검찰 소환조사를 받았다.
인천 연수구의 삼성바이오로직스 본사. 연합뉴스
하지만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은 정현호 부사장 소환조사 이후 이재용 부회장만 남겨둔 상태에서 두 달여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검찰 사정을 잘 아는 법조계 관계자는 “그 사이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검찰총장에 취임하고, 이에 따른 검찰 인사가 있어 내부적으로 정리할 일이 많았다”며 “그럼에도 삼성바이오 수사 지휘 라인은 큰 변동이 없었으며 상당 부분 정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법조계 다른 관계자는 “삼성바이오가 회계조작을 한 것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비율 산정 때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대법원이 삼성에 대해 ‘경영권 승계 작업이 있었다’고 인정했다”며 “검찰은 대법원의 판단을 근거로 삼성바이오 회계조작 및 증거인멸 지시의 최고 윗선으로 이재용 부회장을 지목하고 수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태’ 관련 파기환송심뿐 아니라 삼성바이오를 둘러싼 검찰 수사까지 받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