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은 LG화학과 LG화학의 미국 내 자회사인 LG화학 미시간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와 연방법원에, LG전자도 연방법원에 제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LG화학이 SK이노의 특허를 침해했고, LG전자는 LG화학으로부터 배터리 셀을 공급받아 배터리 모듈과 팩 등을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는 게 이유다.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사업 윤예선 대표는 “LG화학과 LG전자가 특허를 침해한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국내 기업간 선의 경쟁을 통한 경제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국민적인 바람과 산업 생태계 발전을 위해 보류해 오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소송을 제기하게 됐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은 ‘침해당한 특허’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현재 ITC와 사전검토(Preview) 절차를 진행 중이고, 정식으로 제소를 접수하는 시점에 공개한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오는 9월 추석 연휴 전후로 공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선 미국 소송을 두고 ‘초강수’라고 평가한다. ITC와 미국 법원의 강력한 ‘증거개시 절차’와 징벌적 손해배상 때문이다. 증거개시 절차는 정식 변론에 돌입하기 전 소송 당사자가 정보나 자료를 제출·공개하는 법적 의무다. 법원이 요구한 증거를 모두 제출해야 하고, 이를 위반하면 소송 결과에도 영향이 미친다. 한국 법원에도 같은 절차가 있지만 미국이 보다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는 산정되는 손해배상액이 막대하다. 소송에서 패하는 쪽은 어떤 형태로든 타격이 불가피하다.
SK이노베이션은 최근 LG화학과 LG전자를 상대로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전경. 사진=고성준 기자
# 인력 빼돌리기 의혹서 촉발된 배터리 전쟁
양 측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4개월 전부터다. 지난 4월 30일 LG화학은 보도자료를 내고 미국 ITC와 연방법원에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자동차 배터리 기술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LG화학은 자동차 배터리 후발 주자인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 측 인력과 영업비밀을 지속적으로 빼갔다고 주장했다. 당시 LG화학은 소장에서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의 영업비밀을 부당하게 활용해 개발한 배터리를 폴크스바겐의 3세대 전기차에 공급하게 됐다“고 했다.
SK이노베이션은 곧바로 ‘근거없는 발목 잡기’라며 강력 반발했다. ‘인력 빼돌리기’가 아니라 LG화학의 낮은 처우와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기업 문화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등 LG화학의 사내 문화와 실적 등에 대한 날선 비판을 불사했다. 양 측은 이날을 기점으로 나흘 동안 입장문 등의 형태로 반박과 재반박을 반복했는데, 기업 사이의 법적 갈등이 이처럼 공개적으로 중계되는 건 이례적이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6월 서울중앙지법에 ‘LG화학이 미국에서 근거 없는 소송을 제기해 회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취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함께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당시 SK이노베이션이 미국이 아닌 한국 법원에 소송을 냈었던 만큼 확전이라기 보다는 지난 4월 LG화학이 낸 소송에 대한 대응 차원으로만 평가됐다”며 “다만 이번 소송은 다르다. 강대강으로 부딪치는 ‘맞대응’ 성격이 크다. 이제는 어느 한 쪽도 쉽게 물러설 수 없게 됐다”고 설명했다.
# 화해 움직임 있었지만 모두 불발
그동안 양 측이 화해할 것이란 관측은 여러차례 나왔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가 가시화 된 시점이 대표적이다. 전기차 배터리 사업은 ’제2의 반도체‘로 불릴 정도로 정부와 민간기업 모두가 육성하려는 사업인데, 배터리 핵심 소재인 분리막의 대일본 수입이 원활치 않을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오면서 두 기업에 시선이 쏠렸다. SK이노베이션은 이 분리막을 생산하지만 LG화학은 일본 업체들로부터 수입해 오고 있어서다. 실제 SK이노베이션은 ‘국내 경쟁사(LG화학)에 분리막을 공급할 수 있다’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LG화학은 이와 관련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청와대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화해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주재하는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등 ‘5대 기업 모임’에서다. 이 모임은 일본 수출 제한 조치 대응 차원에서 지난 8월 8일 처음 시작됐다. 외부에 알려진 건 두 차례지만 상시적으로 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SK그룹에서는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이, LG그룹에서는 권영수 ㈜LG 대표이사 부회장이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권영수 부회장과 김준 사장은 서울대 경영학과 동문이다. 정치권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김준 사장은 “일본 이슈로 어려운 때인 만큼 대화를 통해 원만하게 풀어가길 원한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김상조 실장도 경제 여건이 좋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비슷한 시기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이 서울 모처에서 회동한 사실이 최근 뒤늦게 알려진 점도 재계의 관심을 모았다. 여기서도 SK이노베이션과 LG화학 현안이 다뤄졌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와서다. 이들은 지난 8월 13일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양 그룹의 여러 CEO들과 함께 자리 했다. 포스코 그룹은 현재 배터리 핵심 소재를(음극재, 양극재) 미래 사업으로 정하고 꾸준히 키우고 있다. 최정우 회장은 취임 전 음극재를 만드는 포스코켐텍 사장을 역임했다. 회장 취임 이후엔 양극재를 만드는 포스코ESM과 포스코켐텍을 합병해 배터리 소재 전문 회사인 포스코케미칼을 설립했다.
재계에선 이 회동과 관련해 SK와 포스코의 ’협업‘ 보다 포스코와 LG그룹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LG그룹과 포스코는 수십년 간 LG가전제품-포스코 강판으로 이어지는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배터리 분야에서도 포스코케미칼의 음극재를 LG화학이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 포스코케미칼은 LG화학의 수요에 맞춰 생산 설비도 증설 중이다. 그밖에 그룹 간 친선 축구 대회를 열기도 하고 사업 관련 자문도 하는 등 소통과 대화가 긴밀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그동안 여러 경로로 꾸준히 화해와 대화 재스처를 취한 SK 측이 포스코를 통해서도 관련 의사 표현을 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포스코와 SK 측은 “그룹간의 향후 협력할 부분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일부 계열사 경영진이 만났다”고 말을 아꼈다.
그동안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화해가 여러차례 관측됐지만 모두 불발됐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 사진=최준필 기자
# 소송전 승패에 따라 한 쪽은 심각한 타격
SK이노베이션 측은 지난 8월 30일 소송 방침을 밝히기 직전까지도 LG화학 측과 대화를 시도하고 ‘맞소송’ 시그널까지 보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도 “원활한 해결을 위해 LG화학에 여러 차례 접촉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공식적, 직접적’으로 대화를 요청해 온 적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SK쪽이 일방적으로 화해 의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업계에선 LG화학도 완전히 문을 닫아 둔 건 아니었다고 입을 모은다.
업계에선 양 측의 주장이 다른 이유가 두 기업의 의사결정과 보고체계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양 쪽이 대화 대상자를 선정하는데부터 이견이 컸다. 각 사 대표자들 뿐만 아니라 실무자들까지 직함이 제각각이라 소통 채널을 정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결국 대화는 커녕 감정의 골만 깊어졌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은 소송을 공식화 한 이후에도 대화 가능성을 열어뒀다. SK 측은 “LG화학·전자는 소송 상대 이전에 국민 경제와 산업 생태계를 건강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협력해야 할 파트너로서 의미가 더 크다는 게 SK 경영진의 생각”이라며 “언제든 대화와 협력으로 해결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LG 측은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LG트윈타워 앞 간판. 사진=박은숙 기자
LG 측은 SK이노베이션의 소송 제기에 보다 강경한 태도로 맞서고 있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의 ‘특허 침해’ 주장이 공개되자 입장문을 내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LG화학은 “양사 특허 수가 14배 이상 격차를 보인다. 경쟁사가 면밀한 검토를 통해 사안의 본질을 제대로 인지하고 소송을 제기한 것인지 매우 의문스럽다”고 밝혔다. 이어 “그간 여러 상황을 고려해 특허권 주장을 자제했으나, 이제는 경쟁사의 특허침해 행위도 더는 묵과하지 않고 법적 조치를 검토하겠다”며 추가 대응을 예고하기도 했다. LG전자는 “대응할 필요성을 못느끼겠다”고 일축했다.
LG 측도 대화의 가능성은 열어뒀다. 다만 조건부다. LG화학은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이에 따른 보상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할 의사가 있다면 언제든 대화에 응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사실상 ‘항복’이라는 조건을 내건 셈이다.
정부와 업계는 양 측 갈등이 깊어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다툼이 격화되고 마지막에 패하는 쪽은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해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미국 소송전에서 소송 금액만 최소 1조 원 대로 추정된다. LG화학이 지난 4월에 산정한 금액이라 SK이노베이션은 이번에 더 큰 금액을 썼을 것”이라며 “여기에 소송에 패소한 쪽은 글로벌 전기차 업체에 배터리 납품도 못하고 기존 거래 업체들로부터 대규모 손해배상 소송을 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관계자도 “정부 차원에서도 상당히 구체적인 대안을 내놨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양 측이 소송의 실익을 고려해 대승적인 차원에서 결단을 내렸으면 한다”고 밝혔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