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화재배 32강전에서 대국 중인 서봉수 9단.
―요즘 기준으로 보면 바둑을 늦게 배웠다.
“중학교 1학년 때다. 서울 대방동에 살던 시절이다. 아버지가 집근처 기원에 다니셨다. 어머니가 찾으면 내가 모시러 갔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으면 기원 원장이 와서 심심하다며 오목부터 시작해 바둑 두는 법까지 알려줬다. 바둑교실도, 선생도, 책도 없던 시절이다. 당시는 고등학생이 조금 두면 영재란 소릴 들었다. 지금과는 아주 다르다. 더 어릴 때 바둑을 배웠다고 해도 실력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어떻게 실력이 늘었나?
“다른 기원에 다니다가 운 좋게 이원식 씨를 만났다. 나보다 4~5살 많은 나이였다. 많이 배웠다. 언제 한번 만나서 소주라도 사주고 싶은데 지금은 연락이 안 된다. 프로가 되어선 실전으로 단련했다. 조훈현 9단에게 가장 많이 배웠다.”
―서 명인도 ‘천재’ 아닌가?
“아니다. 나는 노력형이다. 바둑 수에 대한 재주는 평범한 수준이다. 천재형으로 불리는 기사들과 달리 잔수가 약하고, 빨리 읽지도 못한다. 난 다른 걸 잘한다. 바로 꾸준한 노력이다. 내 나이에 나처럼 노력하는 사람이 있나? 한 분야에 꾸준히 노력할 수 있다면 그게 재주다.”
―최근 인공지능에도 영감을 받았다고 들었다.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감각은 놀랍다. 그러나 인공지능도 완벽하게 이야기 못 하는 부분이 있다. AI 정석이라고 맹신해선 안 된다. 결국 인간과 인공지능이 협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 뭘까?
“오직 노력뿐이다.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만 고수가 된다. 자기가 좋아해야 한다. 그래야 꾸준할 수 있다. 짧은 시간에 고수가 되고 싶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 좋은 환경에서 실력 있는 사람에게 배우면 쉽게 고수가 될 수 있다. 지금은 한국기원에 국가대표팀이 있어 다행이다. 최근 여자기사가 실력이 세진 건 이런 교육환경이 있기 때문이다.”
32강전에서 승리한 서봉수 9단이 저녁에 국가대표들이 모인 검토실에 들러 젊은 프로기사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아직 공부량이 많이 부족하다. 다시 세계대회에 도전하려면 지금보다 세 배는 더 공부해야 한다.“
―2회 응창기배에서 서봉수가 우승했을 때는 조훈현과 달리 카퍼레이드가 없었다. 서운하지 않았나?
“사람들이 항상 처음만 기억한다. 두 번째부터는 열기가 식는다. 그래도 세계대회 우승해서 너무 좋았다. 평생 염원하던 한을 풀었다. 꿈을 이룬 순간이었다. 카퍼레이드와는 아무 상관없이 기뻤다.”
―일인자가 되려면?
“귀를 열어라. 듣는 귀를 가지려면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 또 겸손해야 한다. 어느 종목이나 오만하면 살아남기 어렵다. 혹시 최고가 되더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자기반성도 필요하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누구에게도 배워야 한다’는 자세다. 내가 검토실에서 젊은 친구들에게 많이 배우지만, 내가 가르쳐주는 내용도 분명히 있다.”
―현재 세계바둑 일인자는 누구라고 생각하나?
“누구라고 말하기 어렵다. 가장 많이 노력한 사람이 일인자다. 공부량을 살펴봐야 한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1년 생활이 얼마나 공부로 이어지는지. 바둑 둔 판수, 공동연구, 기보 연구하는 시간을 다 합해서 데이터로 비교하면 일인자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거다.”
―젊었을 때 제법 까칠한 성격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이 아니다. 난 그런 성격이 아니다. 다른 이에게 해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어려선 잔소리 듣는 게 고문이었다. 그래서 내 자식에게도 잔소리는 안 했다. 남을 괴롭히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내가 당해 괴로운데 어떻게 남에게 하나. 상대가 문제를 일으키면 피하면 그만이다. 피할 수 없는데 무경우로 나오면 그냥 아무 소리 안 하고 참고 견딘다.”
―즐기는 음식은?
“어렸을 때는 국자에 설탕을 졸여 만드는 ‘달고나’가 최고였다. 지금도 그 맛을 못 잊겠다. 어떤 초콜릿도 못 따라오는 단맛이다. 젊은 시절엔 무조건 짜장면이었다. 당시 100원 들고 집에서 나가면 차비로 10원 쓰고, 90원으로 짜장면만 사 먹었다. 지겹도록 먹었는데 외국이라도 한번 다녀오면 가장 먼저 짜장면을 찾았다. 지금은 건강 때문에 밀가루 음식을 잘 못 먹는다. 집에선 채식위주 반찬에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주로 먹는다. 누가 해주냐고? 내가 밖에선 프로기사지만, 집에선 15년 차 프로 요리사다.”
박주성 객원기자
[승부처 돋보기] 노장의 투혼, 16강에서 멈췄다. 2019 삼성화재배 16강 ●구쯔하오 9단 ○서봉수 9단 113수 흑불계승 실전진행 서봉수는 32강에서 중국 20대 기사 궈신이 5단을 상대로 흑3.5집승을 거뒀다. 16강에서 만난 구쯔하오 9단은 중국랭킹 2위, 2017년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한 강자다. 이 대국은 서봉수가 초반에 무너졌다. 실전진행을 보자. 백은 좌상귀, 흑은 우하귀를 날일자로 지켰다. 서봉수가 백2로 붙여 하변부터 접전을 시작했다. 붙이고 젖히고 끊고…. 급박한 흐름이다. 흑이 7로 밀고 나가니 백에게 행마가 없다. 서로 최강으로 버틴다. 흑17로 쑥 나오니 대책이 없다. 이때부터 AI 백승률이 10%대로 뚝 떨어졌다. 이후 하변 실리는 흑이 쉽게 차지했다. 서봉수는 “실력 차이를 느꼈다. 상대가 초반부터 완벽하게 뒀다. 내가 생각했던 수읽기와 너무 달랐다”고 말한다. AI에게 물어보니 이 장면에선 참고도 백2로 두면서 하변 실리를 얻는 게 최선이라고 가르쳐 준다. 참고도 박주성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