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국무총리가 6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청과물시장과 청량리종합시장을 방문해 추석명절 농산물 물가점검을 하며 물품을 구입하고 있다. 연합뉴스
# 대학원생 김 아무개 씨(29)는 미혼이다. 고향을 떠나 타지생활을 하는 김 씨는 친지를 만나는 명절이 전혀 기다려지지 않는다. 대학 시절부터 자취를 해 온 김 씨는 명절이 되면 일꾼이 된다. 명절에 일을 하는 부모님 대신 큰집에 가서 제사상을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연세가 많으신 큰어머니는 미혼인 아들이 둘 있다. 하지만 40대인 사촌오빠들은 일손을 거드는 정도여서 큰어머니 혼자 상을 준비하는 게 어렵다. 김 씨는 때로 나이차가 많이 나는 오빠들을 대신해 왜 어린 자신이 일을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럴 때면 사촌오빠들이 얼른 결혼해 명절노동에서 벗어나기를 꿈꿔왔다.
생활 속에서 미미하게 감지되던 가부장제의 무게는 명절에 비로소 본모습을 드러낸다. 온 가족이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구습을 답습하는 것 같은 불편함이 있다. 결혼과 동시에 갑자기 주어지는 며느리와 사위의 지위가 그렇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 명의 개인으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며느리의 도리를 강요받는다. 명절 전후에는 갑자기 효자가 된 남의 편(남편)에 분노하는 아내들이 증가한다. 총각 때 본가에 잘 가지도 않던 남자친구가 결혼 후 돌연 효자가 됐다는 사연이 차고 넘친다. 왜 이런 불편함은 2019년에도 바뀌지 않을까.
그동안 사회적으로는 ‘명절 증후군 극복법, 명절 후 스트레스 해소용 쇼핑, 명절이혼 줄이는 방법‘ 등 사후방편이 논의됐다. 최근에는 부부가 명절에 양가 중 어느 집을 먼저 가냐를 두고 다퉈왔다. 해결 방안으로 명절 2번을 번갈아가며 양쪽 집에 가는 타협점까지 등장했다. 모두 명절에 대한 가족 구성원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전통적인 명절문화의 간소화도 가속됐다. 완성된 추석 차례상을 판매하는 업체도 속속 등장했다. 물가는 오르고 맞벌이 가정이 늘어, 음식을 할 여건이 되지 않자 사먹는 게 낫다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덩달아 가격대비 질이 좋은 가성비 차례상의 인기가 높아졌다. 음식 준비에 드는 시간과 노동력을 감안하면 완성품을 구입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판단이다.
하지만 2030세대는 나아가 가부장적 문화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데 공감대가 이뤄졌다. 단순히 가사노동을 누가 더 많이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남성 위주로 이뤄지는 명절 문화 자체에 반기를 든 것. 다만 명절문화나 가부장제에 대해 남녀의 온도차는 다르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조합원 65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남성의 16.7%는 ‘죽은 뒤 자손들이 내 제사를 지내주기를 희망한다’고 응답했다. 반면 여성의 2.4%만 제사를 원한다고 응답했다. 자신의 제사를 원한다고 답한 남성이 여성에 비해 7배나 많아 화제가 됐다. 한국노총은 주로 여성이 가사노동의 부담을 졌기 때문이라고 설문 결과를 분석했다. 실제 명절 가사노동 부담을 조사한 결과 ’여성이 주로 하고 남성이 거드는 정도‘라는 응답이 73.2%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2030세대는 학창시절 아들 딸 구별 없이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왔다. 그런데 결혼을 하는 순간 인간으로서 개인이 아닌 며느리, 사위의 도리를 요구받는다. 시가의 터무니없는 강요를 받아봤다는 사례는 이미 흔한 얘기다. 제사를 준비해야 하니 회사에 월차를 내고 일을 도우라는 사연, 맞벌이하는 아들 부부인데 아침밥을 먹이는지 확인하는 부모 등이 대표적이다. 장서갈등으로 이혼하는 사례도 크게 늘었다. 쌓였던 불만이 증폭되자 가정 문제의 근본 원인인 가부장제를 타파하자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동등한 부부관계에 개입해 여성의 희생을 무턱대고 강요하는 가부장적 문화는 비혼의 주된 원인으로 급부상했다. 결혼을 했단 이유로 하루아침에 서열 최하위의 며느리 취급을 받는다면 굳이 결혼할 이유가 없다는 게 여성들의 입장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한·중 미혼 여성의 결혼과 출산 가치관 비교’ 조사에 따르면 서울의 미혼 여성 가운데 18%는 결혼하지 않는 이유로 ‘결혼 제도의 가부장성’을 꼽았다.
가부장제의 단면을 날카롭게 묘사한 웹툰 ‘며느라기’가 큰 인기를 모았다. 젊은 부부가 결혼생활을 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은 수직적인 가족문화를 되돌아보게 해줘 호평을 받았다. ‘며느라기’의 수신지 작가는 최근 신작 웹툰 ‘GONE’을 연재 중이다. ‘GONE’은 낙태죄가 합헌을 받은 상황을 가정하고, 발생하는 남녀의 갈등과 고민을 풀어내 많은 독자층을 형성했다.
이서현 에브리마인드 심리상담센터 대표는 2년 전부터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모임을 진행한다. 모임은 ‘이것이 나의 명절’이라는 캐치프레이즈 하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명절을 꾸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임 참여자들은 명절 당일에 만나 차례 대신 ‘브런치 회동’을 한다. 20~40대 등 다양한 나이의 참여자는 서로 가부장제에 대한 불편함과 바뀌어야 할 점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올 추석 모임도 이미 참여자 정원이 다 찼다.
이 대표는 “결혼 전에 남편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명절 양가를 번갈아 찾는 방법도 고민해봤다. 하지만 가부장제에 대한 불편함을 참고 며느리로서 명절을 보냈다면 가족들과 스스로가 더 힘들어졌을 것”이라며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스스로 보내고 싶은 방식대로 명절을 보내니 혼자 싸우는 게 아니란 생각에 재밌고 힘이 난다”고 말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