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00패 이상의 수모를 겪은 탱킹으로 워싱턴 내셔널스가 얻었던 스타 브라이스 하퍼. 연합뉴스
[일요신문] 최근 수 년 간 메이저리그는 ‘탱킹(Tanking)’을 둘러싼 찬반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탱킹은 포스트시즌 진출이 어려워진 프로 구단이 다음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더 높은 순위의 선수를 뽑기 위해 일부러 팀 전력을 약화시키고 패배를 유도하는 작전을 말한다. ‘매 경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프로 스포츠의 기본 정신에 위배되지만, 팀 전력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더 나은 미래를 도모하는 하나의 돌파구로 여겨져 왔다.
비단 프로야구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미국프로농구(NBA) 최고 스타인 르브론 제임스를 잡기 위해 2002-2003 시즌 막바지 많은 팀이 ‘탱킹’ 눈치싸움에 참전한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17승 65패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최하위에 ‘성공’한 클리블랜드가 제임스를 낚아챘고, 그는 팀의 가치를 한 단계 끌어 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탱킹으로 팀을 일으킨 워싱턴
물론 야구는 농구보다 탱킹의 성공 확률이 떨어진다. 5명이 뛰는 농구는 특급 선수 한 명의 가세에 따라 전력이 크게 좋아질 수 있지만, 야구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잘 던지는 특급 에이스도 5경기에 한 번만 나설 수 있고, 아무리 홈런을 많이 치는 중심 타자도 한 경기에 많아야 4~5타석 설 수 있다. 또 유망주 한 명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으려면 최소 네 단계 이상의 마이너리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게 일반적이다. 심지어 그 선수가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으니, 1~2년의 탱킹으로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칫 긴 암흑기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탱킹으로 팀을 강화시키는 데 성공한 구단들이 속속 나타나면서 당장 거액의 자유계약선수를 여럿 영입할 수 없는 스몰 마켓 구단들에게는 최고의 해결책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는 모양새다. 어중간하게 현재와 미래 사이를 오가며 고민하는 것보다 확실하게 현재를 버리고 미래를 택하는 팀이 점점 많아지는 이유다.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약체로 분류됐던 워싱턴은 탱킹을 통해 팀을 일으켜 세운 대표적 팀이다. 2008시즌 막바지 샌디에이고와 메이저리그 전체 꼴찌 싸움을 벌였고, 시즌 마지막 17경기에서 3승 14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내면서 최종 102패를 기록해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팬들 사이에서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의혹의 시선이 쏟아지기에 충분했다. 2009년에도 꼴찌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103패로 시즌을 마쳐 두 해 연속 세 자릿수 패배의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워싱턴이 데려올 수 있었던 선수는 바로 스티븐 스트라스버그와 브라이스 하퍼다. 둘 다 팀을 넘어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특급 스타로 각광 받는 선수들이다. 워싱턴은 스트라스버그와 하퍼가 본격적으로 빅리그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2012년부터 단숨에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강팀으로 뛰어 올랐다. 2012년 지구 우승을 시작으로 2014년 또 다시 우승했고, 2016년과 2017년에는 지구 2연패를 달성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 하퍼가 필라델피아로 이적했지만, 워싱턴은 여전히 지구 2위를 달리면서 내셔널리그 와일드카드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휴스턴 이후 더 거세진 탱킹 바람
그 뒤를 잇는 대표적 탱킹 팀은 바로 휴스턴이다. 워싱턴보다 좀 더 극단적으로 탱킹에 몰두한 휴스턴은 2011년부터 네 시즌 연속 지구 최하위를 찍었고, 그 가운데 세 시즌은 세 자릿수 패배를 당했다. 한때 팀 전체 연봉이 2000만 달러 대에 불과해 다른 구단 스타 선수 한 명의 연봉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 벌어졌을 정도다. “일본 프로야구 구단보다 전체 연봉이 적다”는 굴욕적 원성까지 들었다.
그러나 휴스턴 역시 그 덕에 4년 연속 신인 드래프트에서 최상위권 유망주를 뽑았다. 카를로스 코레아, 알렉스 브레그먼, 조지 스프링어가 연이어 입단해 팀의 주축 선수로 성장했다. 동시에 휴스턴은 포스트시즌을 준비하는 팀에 주축 선수들을 내주고 좋은 유망주와 상위 지명권을 받아 오는 트레이드를 이어갔다. 미국의 스포츠 전문 잡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는 2014년 6월 이런 휴스턴을 향해 ‘3년 연속 100패 팀 휴스턴이 3년 뒤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할 것’이라고 썼다.
놀랍게도 실제로 그렇게 됐다. 휴스턴은 2015년부터 거짓말처럼 상승세로 반등했고, 2017년 월드시리즈에서 결국 LA 다저스를 꺾고 우승했다. 올해 역시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2015년 월드시리즈 우승팀 캔자스시티와 2016년 우승팀 시카고 컵스 역시 한동안 탱킹에 집중하면서 우승과 거리가 멀었던 팀이다. 캔자스시티는 30년, 컵스는 108년, 휴스턴은 55년이 각각 걸렸을 정도다.
특히 캔자스시티는 꽤 오랜 기간 동안 ‘돈도 없고 인기도 없고 성적도 바닥인’ 구단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2006년 부임한 데이튼 무어 단장이 8년간 저조한 성적을 감수하면서 즉시 전력 선수들을 보내고 유망주들을 ‘수집’하는 전략을 폈다. 그 결과 캔자스시티는 ‘젊고 강한 팀’으로 변모해 월드시리즈 정상이라는 숙원을 풀었다. 컵스와 휴스턴 역시 테오 엡스타인과 제프 르나우라는 명 단장들이 각각 3년에 걸친 탱킹으로 팀 체질 개선에 성공한 사례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탱킹의 흐름은 최근 들어 더 강해지는 추세다. 시애틀은 지난 시즌을 마친 뒤 57세이브를 올린 24세 마무리 투수 에드윈 디아즈와 팀 간판 선수인 대형 2루수 로빈슨 카노를 트레이드로 뉴욕 메츠에 보내고 세 명의 유망주를 받아왔다. 카노의 남은 몸값 1억2000만 달러를 다른 팀에 부담하게 하고, 팀 내 유망주 자원의 수를 늘렸다. 같은 지구 경쟁팀인 휴스턴과 오클랜드의 전력을 단기간에 넘어서기는 어려운 상황이니, 그 사이 탱킹을 통해 유망주를 키워 다른 팀의 전력이 약해지는 시점을 노리겠다는 계산이다.
애리조나 역시 간판 내야수 폴 골드 슈미트를 세인트루이스로 트레이드해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최강팀 LA 다저스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미래를 도모하기로 했다. 심지어 지난 7월 31일에는 트레이드 마감 시한을 10분 남겨 놓고 에이스 잭 그레인키를 휴스턴으로 보내는 트레이드까지 감행했다.
2018 신인왕 강백호는 중학생 시절 전학을 선택해 1차 지명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에 2016 시즌 최하위 KT가 2017 드래프트에서 그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연합뉴스
KBO 리그는 최근 들어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는 추세다. 롯데는 새 단장으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출신인 38세 성민규 단장을 선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탱킹이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는 야구 전문가들 대부분이 고개를 젓는다. 한 현직 감독은 “메이저리그는 우리와 문화나 시스템 자체가 다르다. 인위적으로 베테랑을 배제하고 젊은 선수들만 기용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유가 있다. 기본적으로 한국은 특급 유망주의 수가 메이저리그에 비해 훨씬 적다. 무엇보다 1차 지명 제도가 아직 존재하기 때문에 ‘고의 꼴찌’의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 많지 않은 특급 유망주 가운데 대부분은 전년도 최하위 팀이 아닌 연고 지역 구단으로 향한다. 서울 지역 고교에 좋은 자원이 많이 몰려 있다 해도, 서울 세 팀이 먼저 1~3순위 선수를 데려간 뒤 신인 2차 드래프트가 시작되기 때문에 다른 지역 구단들은 그 다음 기회를 잡을 수밖에 없다. 해당 시즌의 ‘최대어’가 학창 시절 전학이나 유급 등의 이유로 1차 지명 대상에서 제외됐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정도다. 지난해 2차 지명 전체 1순위로 KT에 입단한 서울고 출신 강백호가 바로 그런 사례다.
포스트시즌 제도의 차이점도 원인이 된다. 메이저리그는 양대 리그 8개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순간, 모두 디비전 시리즈→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라는 같은 단계를 거쳐야 월드시리즈 진출을 바라볼 수 있다. 와일드카드로 가을야구 티켓을 딴 팀이 최종 우승을 차지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단일 리그제인 KBO 리그는 포스트시즌 경기 방식도 순위에 따른 ‘계단식’이다. 정규시즌 1위 팀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고, 와일드카드전부터 출발해야 하는 4위 팀이나 5위 팀은 사실상 한국시리즈 우승을 넘보기가 어렵다. 포스트시즌 진출 팀과 하위권 팀이 유망주와 주축 선수를 교환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하기에는 감수해야 할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실체 없는 ‘한국형 리빌딩’의 정체
한 팀이 완벽하게 새 판을 짜는 진짜 리빌딩은 이런 이유로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성적과 리빌딩,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이상적 구호는 강팀에게만 유효한 공염불일 뿐이다. 유독 상위권과 하위권의 격차가 큰 올 시즌에도 과감하게 체질 개선을 꾀할 수 있는 팀은 많지 않다. ‘리빌딩’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성적을 내지 못한 팀의 변명거리 중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눈앞의 성적에 따라 감독이 너무 빨리, 자주 바뀌는 KBO 리그 문화에서는 더 그렇다.
성적에 따라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열성팬들의 여론 역시 팀의 리빌딩 플랜에 방해가 된다. 한 현직 프로야구 감독은 “가을야구에 한 번 오른 팀은 그 다음 해에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해야 박수를 받을 수 있다. 한 번 올라간 팬들의 눈높이는 좀처럼 낮아지지 않는다”며 “리빌딩은 장기적이고 거시적으로 진행돼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렵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수 년 전 한 감독은 구단의 장기 계약과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최대한 유망주를 많이 기용하는 인위적 리빌딩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그러나 성적이 나지 않자 팬들의 원성과 구단의 의심이 고개를 들었고, 결국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경질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 감독들이 뚝심 있게 리빌딩을 밀어 붙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자칫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 성적도, 리빌딩도 모두 놓치는 일이 다반사다.
올해 팀이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한 현직 감독은 익명을 전제로 “한국형 리빌딩은 승리가 뒷받침돼야 가능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팀에 현재 승리를 안길 수 있는 베테랑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가운데 팀의 미래를 위해 성장해야 하는 신예 선수들을 몇 명 적절하게 끼워 넣는 게 가장 바람직한 리빌딩 과정”이라며 “리빌딩도 이기는 과정에서 승리하는 법을 배우는 게 리빌딩이지, 젊은 선수들 위주로 게임을 하다 형편없는 경기력으로 계속 패한다면 결코 성장 동력을 얻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인기 하락 요소로 꼽히는 ‘애물단지’ 탱킹 탱킹은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많은 전략이다. 기본적으로 ‘승리를 위해 싸우는’ 야구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미국 언론들은 몇 년 전부터 야구 인기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탱킹을 꼽고 있다. 치열한 순위 경쟁은 단숨에 팬들의 관심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최고의 흥행 카드인데, 탱킹이 이런 당연한 순리를 방해한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하위권 팀들이 시즌을 빨리 포기하고 백기를 들면서 강팀들은 별다른 라이벌 없이 승승장구를 이어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중위권에 머물던 팀이 시즌 후반 기적 같은 연승 행진으로 승부를 뒤집는 반전 드라마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통계도 우려를 뒷받침했다. 지난해 메이저리그 평균 관중은 2만 8830명에 불과해 2003년(2만8013명) 이후 15년 만에 최저 수치를 보였다. 30개 구단 가운데 17개 구단의 관중이 감소했고, 신시내티·볼티모어·시카고 화이트삭스·미네소타·마이애미·피츠버그까지 6개 구단은 홈 구장 개장 이래 최저 관중을 기록했다. 이 6개 구단 가운데 피츠버그와 미네소타를 제외한 4개 구단이 모두 지구 꼴찌에 머물렀고, 피츠버그와 미네소타 역시 각각 투타 핵심 선수를 다른 팀에 팔아버리거나 승률이 5할에도 미치지 못해 빈축을 샀다. 메이저리그의 슈퍼 에이전트 스콧 보라스는 이와 관련해 올해 초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탱킹을 위해 100패를 감수하는 팀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을 한탄하면서 “기준 이하 승률을 기록하지 못한 팀은 드래프트 상위 지명권을 얻지 못하게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는 한 야구 전문기자와 인터뷰에서 “만약 특정 팀이 68승(승률 0.420) 이상을 거두지 못한다면 전체 5순위 안에 드는 지명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했으면 좋겠다”며 “지금 상황을 (장사가 잘 안 되는) 식당에 비유하자면, 좋은 음식으로 손님을 다시 모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단가를 낮춰 싸구려 음식을 계속 만들어 내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누군가 야구장에 간다면,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길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늘 우리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야구를 봐야 한다”고도 했다. 탱킹의 맹점과 부작용을 정확하게 짚은 코멘트다. 메이저리그 선수 노조도 일부 구단들의 노골적인 탱킹 전략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규정 개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승률 높은 팀에 신인 지명 우선권을 주고, 일부러 낮은 승률을 기록하는 팀은 징계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승률이 가장 낮은 팀에 드래프트 우선권을 주는 현 규정과 완전히 정반대인 내용이다. 선수 노조는 “큰 수익을 내지 못하는 스몰 마켓 구단이 시즌 승률 0.500을 넘거나 포스트시즌에 출전하면 그 성과를 인정해 신인지명에서 우선권을 행사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반대로 2년 연속 시즌 90패 이상을 기록한 팀은 드래프트에서도 불이익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몇 년 후 성적을 핑계로 당장 선수단에 충분한 투자를 하지 않는 상황을 막기 위해 드래프트 규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