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 서울 양천구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 야구 경기 현장. 사진=연합뉴스
[일요신문] 9월 6일 ‘한국 대학 스포츠 최대 이벤트’라 불리는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정기전이 열렸다. 이날 연세대는 야구와 아이스하키에서 승리를 따냈다. 고려대는 농구 경기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통상적으로 정기전은 이틀 동안 야구, 아이스하키, 농구, 럭비, 축구 5경기를 치른 뒤 우승팀을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올해 정기전은 3종목을 마친 뒤 끝이 나버렸다. 9월 7일 한반도가 태풍 ‘링링’의 영향권에 들며 기상이 악화된 까닭이었다.
연세대와 고려대는 태풍 ‘링링’ 북상과 관련해 재난 안전사고 예방 차원으로 7일 예정된 럭비, 축구 경기를 취소하기로 합의했다. 1965년 정기전이 5개 종목 체제로 출범한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국 2019년 정기전은 2승 1패를 기록한 연세대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2019년 기준 ‘정기전 역대 우승 전적’에서 연세대는 21승 10무 18패로 고려대를 앞서고 있다.
정기전은 한국을 대표하는 ‘사학 라이벌 스포츠 제전’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과 게이오 대학의 ‘경조전’,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릿지 대학의 ‘옥스브리지 더비’, 미국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의 조정 경기 등 세계적인 대학 스포츠 이벤트와 맥을 같이하는 행사가 바로 정기전이다.
연세대와 고려대의 정기전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 스포츠 메가 이벤트’다. 사진은 1985년 정기전 축구 경기 장면. 사진=연합뉴스
과거 정기전은 ‘한국 구기종목의 젖줄’이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스타의 산실이기도 했다. 차범근, 홍명보, 이천수, 박주영(이하 고려대), 허정무, 최용수, 송종국, 황의조(이하 연세대) 등은 양교 축구부 소속으로 정기전을 경험한 이들이다.
야구 종목에서도 양교의 스타군단 면면을 살펴보면, 입이 ‘쩍’ 벌어진다. 고려대는 ‘국보급 투수’ 선동열을 필두로 프로야구 전설이라 불릴 만한 선수들을 여럿 배출했다. 박노준, 박동희, 손민한, 김선우, 김동주 등이 고려대 출신 야구 스타다. 반면 연세대 야구부를 대표하는 인물은 ‘무쇠팔’ 최동원, ‘불사조’ 박철순이다. 이순철, 김봉연, 박재홍, 조인성 등 전설적인 선수들 역시 연세대 출신이다.
2000년대 후반 정기전에서 선발 맞대결을 펼치기도 했던 고려대 문승원(SK 와이번스)와 연세대 나성범(NC 다이노스)은 현재 프로야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는 야구 선수로 활약 중이다.
다음은 농구다. 고려대와 연세대 ‘사학 라이벌’은 한국 농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대 ‘농구대잔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시절. 양교의 맞대결은 국가대표급 라인업을 자랑하는 최고의 흥행카드였다.
당시 고려대는 현주엽-신기성-양희승-김병철-전희철을 연세대는 서장훈-이상민-문경은-우지원-김훈을 앞세워 모든 경기를 ‘마지막 승부’처럼 치열하게 펼쳤다. 양교 농구부는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며, 지금의 아이돌 그룹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이처럼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모교의 명예를 걸고 진검승부를 펼치는 정기전은 한국 스포츠를 대표하는 이벤트 중 하나로 여겨졌다.
한국 대학 스포츠는 위기를 맞았지만, 정기전의 응원 열기는 여전히 뜨겁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다. 최근 들어선 고려대와 연세대 출신 스포츠 스타 비중이 점점 줄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 대학 스포츠의 쇠락과 궤를 같이한다.
미국의 NCAA(미국대학체육협회)가 미식축구, 농구, 야구 등 여러 종목에 걸쳐 흥행전선에 이상이 없는 것과 달리, 한국 대학 스포츠는 고사 위기에 직면해 있다. 수준 높은 고교 유망주들이 대학 진학을 꺼리고, 프로 직행을 타진하는 경우가 빈번해진 까닭이다.
정기전 역시 시대의 흐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기전의 경기 수준은 분명 과거 ‘스타군단의 맞대결’이 펼쳐지던 20세기만 못한다. 하지만 정기전의 열기는 여전히 뜨겁다. 정기전이 열리면 종목을 막론하고, 경기마다 수많은 학생이 운집해 열띤 응원전을 펼친다.
‘일요신문’ 취재에 응한 체육계 복수 관계자는 “정기전처럼 흥행성 있는 콘텐츠는 한국 대학 스포츠 회생에 큰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 중 한 체육인은 “이제 대학 스포츠는 과거처럼 ‘스타 마케팅’에 매달려선 안 된다. 대학 커뮤니티 내부에서 대학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끌어야 한다. 대표적인 모범사례 중 하나가 바로 연세대와 고려대의 정기전”이라고 말했다.
그 가운데 정기전을 둘러싼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편이다. 일각에선 정기전을 “폐쇄적인 엘리트주의의 산물”이나 “그들만의 리그”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과연 정기전이 이런 비판의 목소리를 무릅쓰고, 한국 대학 스포츠를 대표하는 ‘킬러 콘텐츠’로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지 주목할 만하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