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건축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나라의 국보이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목조건축물이라는 점이다. 나무로 만든 건축물들이 어떻게 700여 년 세월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의 뒤안길에는 다름 아닌 대목장의 전통과 숨결이 깊이 배어 있다.
화재로 불탄 뒤 복구된 국보 1호 숭례문의 2층 내부 모습. 연합뉴스
대목장(大木匠)은 한국의 전통 목조건축, 특히 전통 목공기술을 가지고 있는 목수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무를 다루는 장인을 전통적으로 목장(木匠) 또는 목수라고 불렀다. 목수의 여러 가지 작업 중에서 ‘대목’이란 궁궐이나 사찰과 같은 큰 목조 건축물을 짓는 일을 뜻하는 것으로, 그런 대목 일을 담당하는 목수를 ‘대목장’이라고 칭했다. 반면 목재를 이용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궤·문갑·책상·장롱 등 가구와 생활용품을 제작하는 목수를 소목장(小木匠)이라 불렀다.
대목장의 역할은 단순히 목공에 그치지 않는다. 대목장은 전통 건축물의 기획·설계·시공뿐만 아니라 휘하에서 일하는 목수들에 대한 관리·감독에 이르기까지 전체 공정을 책임지는 장인이다. 현대의 건축가를 일컫는 전통적 명칭이 바로 대목장인 셈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을 보수하거나 새로 건물을 올릴 때 나무를 고르고 벌목하는 최초 과정부터 도목수(목수의 우두머리), 즉 대목장의 진두지휘를 받도록 했다.
마루도리를 얹어끼울 때 달구질하는 모습. 문화재청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궁궐과 사찰 등을 지으며 목조건축이 발달했기에 솜씨가 뛰어난 목장(목수)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신라시대에는 경주를 관할하는 관청 전읍서에 정원 70명의 ‘목척’이라는 관직을 두었다. 목척이란 ‘나무 장인’이란 의미로, 이들 중 상당수가 전문 목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목업에 벼슬이 주어졌고, 조선시대에는 60~100인의 목장을 선발해 선공감(토목·영선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에 소속시켰다. 세종 때에는 숭례문 수리 공사를 맡았던 대목장에게 ‘사직’(정오품)이라는 관직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목수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가 없어졌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 전통 목조건축 또한 위기를 맞는다. 특히 이 시기에는 목수의 전통적인 연장마저도 일본의 연장과 혼용되거나 교체되는 등 그 맥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왜곡되기도 했다.
환도리 다듬질 모습. 문화재청
20세기 들어 궁궐이나 관아 등 큰 목조건물을 짓지 않게 되면서 대목장의 직능은 한층 쇠퇴하게 된다. 사찰이나 개인의 집을 목조로 건축하는 일로 기술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게 된 것이다. 정부는 대목장의 전통을 보호하고 지속적으로 이어가도록 하기 위해 1982년 대목장 기능과 지식을 국가무형문화재(제74호)로 지정했다. 2019년 현재 신응수, 전흥수, 최기영 3인의 대목장 기능보유자가 후학을 양성하며 우리 전통 목조건축의 아름다움과 정체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상당수 우리 문화유산은 대목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창덕궁과 불국사 같은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한국의 전통 목조건축물도 대목장의 지휘 아래 건축되었다. 대목장이라는 이름이 더욱 빛나는 까닭은 목조건축을 통해 과학기술자로서의 능력과 함께 예술가로서의 빼어난 감각을 꽃피웠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이러한 대목장의 고유한 기능과 가치를 인정해 2010년 ‘대목장, 한국의 전통 목조건축’이란 명칭으로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했다.
“배움이란 끝이 없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배우는 것이 기능인의 길이요, 인생의 길이다.”
대목장 최기영 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시한 글의 일부이다. 그는 대목장 기능보유자이지만 언제나 자신을 ‘최 목수’라 부른다. 그 이유는 본인을 낮출 줄 알아야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어린 제자가 일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새로운 연구를 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끊임없는 배움의 열정, 그리고 그 열정으로 탄생하는 새로운 건축물이야말로 역대 대목장들이 후대에게 물려주고픈 가장 큰 자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료협조=유네스코한국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