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택테니스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이형택 이사장. 2주일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진=고성준 기자
[일요신문] 현재 대한민국 테니스를 이끌고 있는 정현의 등장 이전까지 한국 테니스의 간판은 이형택(43)이었다. 그는 정현이 지난 2018년 4월, 19위로 신기록을 세우기까지 ATP 투어 랭킹 36위로 한국인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그랜드슬램 대회인 US오픈 16강 진출 등 국내의 테니스 관련 최초, 최연소 기록을 대부분 갈아치웠던 그다. 선수 은퇴 이후에도 지도자, 해설위원 등으로 꾸준히 활동했던 이형택은 최근 스포츠 레전드들과 함께 인기 예능 프로에 출연하며 대중 앞에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몸관리를 위해 요즘 술도 끊었다”며 날렵해진 턱선을 자랑하는 이형택을 ‘일요신문’이 지난 9일 만났다.
#술 끊고 몸만들기…선수 때보다 바빠진 근황
이형택이 술을 끊은 이유는 ‘축구를 잘하려고’였다. JTBC 예능 ‘뭉쳐야 찬다’에서 이만기, 허재, 양준혁 등 각 분야 전설들과 발을 맞추고 있다. 그는 “처음엔 허허실실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다들 한가락하셨던 분들 아닌가. 자꾸 지니까 요즘은 선수들끼리 좀 심각해진 상황이다(웃음). 승부욕이 올라오니까 다들 몸을 만들어서 온다. 그래서 나도 겸사겸사 술을 끊고 5kg 정도 빠졌다.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허재 형님도 ‘야 내가 요즘은 폭탄주 세 잔을 열 번에 나눠 마신다’고 하시더라”며 웃었다.
그렇다면 방송에서 매번 레전드들이 외쳐대는 ‘회식’은 없는 것일까. 그는 “사실 다들 바쁘니까 말로만 그러지 회식을 잘 못한다”며 “공식적인 회식은 딱 두 번이었다. 나 들어오기 전에 한 번, 그리고 다 같이 한의원 갔던 날 한 번. 녹화가 늦은 시간까지 이어져서 끝나면 각자 집에 가기 바쁘다”고 말했다.
‘뭉쳐야 찬다’ 외에도 최근 아프리카TV를 통해 인터넷 방송을 시작하기도 했다. 테니스 중계를 위주로 향후 다양한 콘텐츠를 계획 중인 방송국 이름은 ‘머드Lee형택’이다. 방송에서 불리는 별명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했다. 그는 “정형돈이 방송 중 즉석에서 지어준 별명이다. 나름 마음에 들고 시청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설명했다.
인터넷 방송이 아직 생소하지만 이형택은 혼자서도 휴대폰 카메라 앞에서 그럴듯하게 ‘1인 방송’을 이어갔다. 그는 “사실 내가 말이 적은 편은 아니다(웃음). 어색하지 않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시청자들이 올려주는 채팅 덕분이다. 서로 묻고 답하는 방식이라면 몇 시간이든 이야기를 이어나갈 자신은 있다”며 웃었다.
이 같은 방송 출연과 함께 다양한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형택이다. 그는 이형택테니스아카데미 이사장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한국을 자주 드나들고 있다.
“3년 전에 미국으로 넘어갔다. 사실은 미국 IMG 아카데미 같은 학교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기본적으로 공부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공부를 병행하면서 다양한 스포츠를 접하고 가능성 있는 분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을 만들려 하고 있다. 온라인 강의를 하고 체계적으로 운동도 하는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중이다. 미국에서는 대학 진학 때 홈스쿨링이 인정된다. 원한다면 진학도 지원할 것이다. 국내에서도 축구의 이영표, E스포츠의 젠지 게임단과 협업을 하고 있다.”
‘선수 때보다 더 바쁜 것 아닌가’라는 말에 “정말 그런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과거 선배들이 ‘운동할 때가 좋은 거다’라고 하셨는데 그땐 몰랐다. 운동할 땐 컨디션 조절 등 나만 생각하면 됐다. 지금으로선 그때가 아쉽다. 더 오래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고 했다.
방송에서 공개된 서정원 감독과 이형택 이사장의 친분. 사진=JTBC
#축구로 달라진 인기 실감
‘한국 테니스 간판’이었던 그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전 일이라 요즘 젊은 분들은 나를 잘 몰랐다”면서도 “‘뭉쳐야 찬다’ 출연으로 다시 많은 분들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방송 잘 보고 있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듣고 있다”며 웃었다.
방송 출연으로 인해 최근에는 포털 사이트 연관 검색어에 서정원 감독이 추가되기도 했다. 방송에서 이형택과 서 감독이 함께 식사를 하는 에피소드가 소개됐기 때문이다. 전직 테니스 선수와 축구 선수의 친분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이형택은 “과거 둘 다 삼성팀 소속이라 알게 됐다. 그때 많이 친해지진 않았는데 나중에 윤정환 감독 등 아내들끼리 친분이 생겨 가족 모임도 가지면서 관계가 깊어졌다”고 설명했다.
서 감독으로부터는 ‘예능감 좀 살리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나도 지인들과 함께 있을 때 분위기를 주도하고 말도 재미있게 하는 편이다. 정원이 형 입장에서 그런 내가 방송에서는 말하는 모습이 많이 나오지 않아 안타깝게 느낀 것 같다. 편집이 되는데 어떡하나. 그리고 요즘 허재 형님은 아무도 못 이긴다”며 웃었다.
이형택은 팀이 결성되고 방송이 진행되던 도중에 전격 영입됐다. 그의 영입 소식에 일부 스포츠팬들은 ‘이형택의 축구 실력이 상당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이형택 영입 이후에도 팀의 경기력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지는 않았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는 “많은 분들이 기대가 크셨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웃음). 테니스 선수의 체력에 대한 기대였을까”라며 “과거 홍명보장학재단 자선축구경기가 열리던 초창기에 유도선수 이원희와 함께 초대된 적이 있다. 그땐 선수 시절이라 여기저기 잘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기억하고 팬들이 기대를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2주일에 한 번 만나서 손발을 맞춘다는 것이 당연히 힘들다. 그래도 요즘은 다들 정말 진지한 자세로 임하고 있으니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셔도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단순히 선수만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인재로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고성준 기자
어린 선수 육성을 위해 한국과 미국을 부지런히 오가는 이형택이다. 그의 이번 미국행에는 최근 주목받는 테니스 유망주 한찬희 군과 함께할 예정이다. 그가 이처럼 유망주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과거에 비해 국내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엔 테니스협회에서 육성 사업에 공을 많이 들였다. 조동길 전 협회장(한솔그룹 회장)이 계실 때에는 기금을 따로 마련해서 투자가 많았다. 당시 잠재력 있는 선수들을 모아 집중적으로 경기를 하고 육성했다. 이전까지 주니어 그랜드슬램에 국내 선수가 한두 명 갈까 말까 하는 정도였는데 그 프로그램 이후 6명이 올라가더라. 그때 함께했던 선수들이 지금 시대를 이끌고 있는 정현, 권순우, 홍성찬 등이다.”
좋은 결과를 냈던 육성 사업의 흐름은 현재 이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형택은 “과거와 같은 투자가 적극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면서 “정현이 좋은 성적을 내기 전까지 어린 선수들이 롤모델로 삼을 만한 선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국내 현실이었다. 정현 세대의 뒤를 이을 선수들이 계속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망주 육성 이외에도 테니스계 현실에 대해 몇 가지를 지적했다. 국내 최대 테니스 국제대회인 코리아오픈과 관련해 “우리나라에서 만든 권위 있는 대회다. 하지만 개최권을 지키지 못하고 홍콩 쪽에 넘어갔고 최근 몇 년간 개최권을 임대하는 방식으로 열리고 있다. 국내 개최만큼은 지키기 위한 노력은 박수 받아야 하지만 올해는 정말 어렵게 열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현실들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동호인 규모 등 저변은 충분히 넓다고 본다. 과거엔 초보자가 진입하기 어려운 장벽도 있었지만 요즘은 구력이 길지 않은 동호인 대회도 신설되는 등 테니스를 접하기가 훨씬 쉬워진 환경”이라며 “이런 면을 잘 활용하면 좋은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실이 그렇지 않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이형택의 관심사는 유망주 육성에 집중돼 있다. 다만 그의 목표는 ‘훌륭한 선수’를 키우는 것만이 아니다.
“선수를 가르칠 때 반드시 공부도 병행하게 한다. 선수생활을 하다가도 다양한 분야로 갈 수 있게 지원해주고 싶다. 해외에는 테니스를 하다가도 운동역학, 심리학, 트레이닝, 행정 등 다른 공부를 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전문 선수 생활을 경험해보고 다른 분야로 가는 인재가 나오는 게 그 종목을 튼튼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대한민국 스포츠가 튼튼해질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은사 김종관 감독 떠나보낸 이형택의 눈물 ‘일요신문’이 이형택 인터뷰를 진행한 날(9일) 라파엘 나달과 다닐 메드베데프의 US오픈 결승전이 열렸다. 이형택은 인터넷 방송으로 이 경기를 중계했다. 그는 5세트 접전 끝에 나달의 우승으로 끝난 경기에 대해 “사실 나달이 손쉽게 우승을 차지할 거라고 예상했다”면서 “그런데 메드베데프의 흐름으로 넘어가며 경기도 넘어가는 듯했다. 그래도 나달이 다시 흐름을 찾아오더라. 역시나 경험은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형택은 지난 2000년 US오픈에서 그랜드슬램 16강 무대를 최초로 밟은 한국인이다. 사진=고성준 기자 로저 페더러, 노박 조코비치 등과 함께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테니스계를 지배하고 있는 나달은 이번 우승으로 자신의 19번째 그랜드슬램 우승을 달성하게 됐다. 그는 우승 이후 대회 측이 준비한 자신의 커리어 하이라이트 장면을 보며 눈물을 짓기도 했다. 이형택 또한 이 결승전을 특별한 감정으로 지켜봤다. 경기가 열린 미국 뉴욕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센터는 이형택이 개인 커리어 최초이자 대한민국 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 16강에 진출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경기를 보면서 그때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선수생활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 중 하나다. 그 경기장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관중석이 설치돼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나달의 눈물을 보며 그에게도 눈물을 지었던 경험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글쎄, 울컥했던 적은 많았는데 눈물이 흘렀던 적은 있었는지 모르겠다”라면서 “개인적으로는 최근 눈물을 펑펑 쏟은 적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가 눈물을 쏟은 이유는 지난 9월 6일 은사 김종관 감독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김 감독은 이형택의 학창시절 코치였다. 그는 “감독님이 일방적으로 지도하시기보다 내가 스스로 플레이할 수 있도록 지켜봐 주셨다. 그래서 나만의 강점을 가진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감독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 한국으로 들어올 때 옷(상복)을 챙겨왔다. 그러면서도 ‘괜찮겠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국 소식을 듣고 빈소가 마련된 춘천으로 바로 달려갔다. (돌아가신) 감독님을 뵙고 향을 피우려는데 손이 덜덜 떨려서 너무 힘들더라. 나도 모르는 새에 눈물이 줄줄 흘러 나왔다. 발인하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이형택이지만 ‘테니스’라는 본분은 잊지 않고 있다. 그는 “감독님은 올해까지도 학교에서 끊임없이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셨다. 나도 감독님을 본받아 언제까지나 선수 육성에 힘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