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신임 법무부 장관이 9일 경기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범보수 대 범진보’의 양극단. 어게인 2012는 한국 정치의 축소판이다. 총·대선을 같은 해에 치른 2012년, 여야는 사즉생 생즉사의 각오로 지지층 결집을 위한 진영논리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전격 등판시키며 ‘참여정부 시즌2’에 제동을 걸었다. 민주당은 문재인 대통령을 주축으로 한 혁신과통합·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과 전격 통합, ‘반이명박근혜’ 전선을 형성했다. 반노(반노무현)와 반이명박근혜가 정면충돌한 셈이다. 결과는 새누리당(152석)의 압승. 그로부터 8개월 후 치른 18대 대선에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51.6%)은 문 대통령(48.0%)을 꺾었다.
양 진영의 희비를 가른 것은 ‘중도 선점 효과’였다. 보수 단일대오를 꾸렸던 박 전 대통령은 2010년 12월, 한국형 복지국가 모델 구상을 처음 공개했다. 참여정부 복지국가 설계도인 ‘비전 2030’을 만들었던 김용익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은 이듬해 한 토론회에서 박근혜식 복지 구상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박정희의 딸인가, 노무현의 누이인가”라며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비전 2030’과 놀랍도록 일치한다”고 말했다. 이 시기는 민주당이 보편적 복지인 ‘3+1(무상급식·보육·의료+반값 등록금)’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을 때다. 새누리당이 중도층으로 외연 확장할 때, 민주당은 집토끼(지지층) 잡기에만 매몰됐다는 얘기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민주화 이후 역대 정권의 통치 방식에 답이 있다”고 말했다. 문민정부 시발점은 1990년 3당(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이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간다”며 군부세력과 집권 동맹을 맺었다. 5년 뒤 출범한 국민의정부도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의 산물이다. 참여정부의 출범은 노·정(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한몫했다. YS와 DJ,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반대편과 손을 잡았지만, 지지층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YS와 DJ 정부의 위기는 JP와의 결별에서 시작됐다. 참여정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 직전 노·정 단일화가 깨지며 제3세력 흡수를 못 한 채 출발했던 참여정부는 이후 전국정당화 명분으로 호남과의 결별을 시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참여정부의 ‘호남 홀대론’은 20대 총선(2016년) 때까지 민주당을 괴롭혔다. 민주당은 당시 총선에서 호남 28석 중 3석을 건지는 데 그쳤다.
문제는 조국 정국이 어게인 2012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민주당은 ‘5% 중도층이냐, 30% 지지층이냐’의 양자택일에서 후자를 택했다. 2012년 총선 때도 민주당은 중도 외연보다는 노·이·사(친노·이대·486그룹) 공천을 앞세워 집토끼(지지층)를 잡는 데 치중했다. 실제 민주당 관계자들은 조국 퇴진 여론이 확전했을 당시에도 “조 장관이 무너지면 정권이 흔들린다” “30% 핵심 지지층이 날아간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조 장관이 버티는 순간, 조국 정국은 문재인 대통령의 문제로 치환됐다. 삭발 투쟁 승부수를 띄운 황교안 한국당 대표를 비롯한 야권 의원들이 연일 ‘문재인 퇴진’을 외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1야당 대표가 삭발투쟁을 한 것은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민주당의 ‘조국 지키기’가 중도 외연 확장을 막은 전략적 오판이란 지적도 만만치 않다.
반면 보수진영은 반 조국 전선 구축에 시동을 걸었다. 보수 야당 간 이견차로 원샷 대통합은 쉽지 않을 전망이지만, 황 대표 선거 구상으로 알려진 ‘범보수 간 선거연대’의 기반은 마련된 셈이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보수 통합 여부가 조국 정국 시즌2의 분수령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면서 “역설적이지만, 조국 임명 강행 이후 문 대통령 국정운영의 성공 키는 박 전 대통령이 쥐고 있다”라며 “‘문재인 대 박근혜’ 구도였던 어게인 2012의 재연”이라고 했다.
외부 병원 입원 차 구속 900일 만에 구치소 밖으로 나온 박 전 대통령 입에 정치권 이목이 쏠리는 이유다. 박 전 대통령은 수감 중에도 우리공화당 당명 변경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옥중 정치’를 일으켰다. 현재 야권 분열이 탄핵 찬반을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박 전 대통령이 “모두 내 잘못이다” “통합해 이겨 달라” 등의 메시지를 던질 경우 보수대통합 시계추는 한층 빨라질 전망이다.
9월 1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울 서초구 가톨릭대학교서울성모병원에 들어서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어깨 수술을 위해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했다. 고성준 기자
반 조국 전선이 ‘무늬만 반문 연대’에 그칠 경우 총선뿐 아니라 차기 대권 구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현재 보수진영은 ‘인물난’에 시달리고 있다. 황 대표를 제외하면 대표급 주자는 전무하다. 황 대표마저도 ‘선수 교체론’에 시달리는 중이다. 보수 통합에 실패하면, 보수 대권 잠룡의 지리멸렬한 상황이 계속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경우 보수진영은 ‘박근혜 침묵→보수 분열→명분 없는 소통합→선거 패배’ 등의 악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최근 황 대표 측이 다야 보수를 묶어 선거연대를 하는 전략을 논의한 이유도 이런 까닭에서다. 보수대통합은 소선거구제 유지를 전제로 한 총선 승리 방정식에 가깝다. 국회에서 논의 중인 준연동형 비례대표가 도입되면 ‘진보 대 보수’의 일대일 구도보다는 다당제를 골자로 한 선거연대가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
보수 야당 한 축인 바른미래당의 제3 세력화 가능성도 보수진영 선거연대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독일에 체류 중인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대표도 선 독자 세력화를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당 이태규 의원은 안철수 전 대표의 한국당행에 대해 “호사가들의 얘기”라고 일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승민계가 한국당에 흡수 통합될 가능성도 낮다. 탄핵에 찬동한 개혁적 보수 세력의 백기투항 없이 한국당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전략통인 우상호 민주당 의원은 일부 언론과 인터뷰에서 DJ의 새천년민주당 창당을 언급하며 “(유승민계가)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제3지대 창당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다당제 구도가 내년 총선까지 유지된다면, 여당의 2연속 총선 승리는 한층 가까워진다. 다만 여권도 딜레마에 둘러싸였다. 조국 정국 장기화와 중도 외연 확장은 양립 불가다. 여권이 정치적 변곡점마다 조국 벽에 부딪힌다면, 탄핵 과정에서 이탈한 중도·보수 지지층을 민주개혁 동맹으로 견인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검찰에 허를 찔린 여권이 되레 ‘박근혜 사면’을 앞세운 보수 동맹에 일격을 당할 수도 있다. 레임덕 위기에 처한 여당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보수진영 분열에 따른 반사이익이다. 대안 야권 세력의 부재다. 야권 관계자는 “보수 통합 등 외부 변수에 민주당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은 총선 내내 여권의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