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식당’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정인선이 아역 배우 시절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한 이 대사는 결국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2006년까지 공소시효가 아직 몇 년 남아 있던 2003년에 개봉한 ‘살인의 추억’의 이 대사는 지금(2003년)도 범인이 버젓이 화성 어딘가를 오가며 살인을 추억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어딘가 있을 범인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된 인물은 이미 1994년에 다른 혐의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었다. 결코 그는 2003년에 다시 현장을 다시 찾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 ‘살인의 추억’ 홍보 스틸 컷.
영화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할지라도 영화는 창작에 기반을 둔 영화적인 요소에 더 집중하게 된다.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범에게는 특유의 습성이 있다’는 부분을 강조했다. 비 오는 날 사건이 벌어지고 빨간 옷을 입은 여성이 피해자라는 게 대표적이다. 그리고 영화 중반부에선 사건 발생일마다 라디오에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라는 노래가 틀어졌다는 점이 부각된다.
그렇지만 실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다르다. 실제로 사건 당일 비가 내린 것은 9번의 사건 가운데 단 2번뿐이다. 그것도 2차 사건 당시에는 이슬비였고 6차 사건 때만 굵은 비가 내렸다. 빨간 옷도 사실이 아니다. 실제 그 즈음 피해자들이 빨간 옷을 입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밤에는 의상의 색상 구분이 어려워 범인이 빨간 옷을 입은 여성만을 피해자로 특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당시 수사팀장이었던 하승균 전 총경은 ‘화성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책에서 “당시 여경에게 빨간 옷을 입히고 어둠 속을 걷게 하는 실험을 해봤지만 실제 실험해보니 2~3m만 떨어져도 색 구분이 안 됐다”고 설명했다.
또한 영화에서 용의자 특정에 결정적인 증거가 된 노래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는 실제 사건과는 무관한 영화적인 상상력에 의한 것이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 홍보 스틸 컷.
#용의자들, 그리고 모방범
영화에서는 다양한 용의자가 등장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이는 이 영화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박노식이 연기한 ‘백광호’다. 그는 유력한 용의자였다가 유일한 목격자로 급부상하지만 불행히도 열차에 치여 사망한다. 실제로 기차에 치여 사망한 용의자가 있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한 용의자가 주민 신고로 경찰에 체포됐지만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났다. 한동안 경찰이 미행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중단했다. 그렇지만 그는 점점 정신질환이 심해졌고 결국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영화처럼 경찰을 피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난 것이 아닌 자살이었다.
영화 속 또 다른 유력 용의자는 류태호가 연기한 ‘조병순’이다. 늦은 밤 무덤가에서 여자 속옷을 두고 홀로 음란 행위를 하다 잠복 중이던 형사들에게 체포된다. 송강호가 연기한 박두만이 공사 현장까지 따라가 수많은 근로자들 사이에서 조병순을 잡아낸 뒤 수통에 든 물을 마시는 장면은 이 영화의 명장면 가운데 하나다.
사실 이 장면은 모방범죄의 범인을 경찰이 검거한 부분을 차용한 것이다. 1988년 9월에 화성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수법과 장소 등이 달라 경찰은 모방범으로 추정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이 사건은 경찰이 사건 현장에서 수거한 음모를 통해 범인을 검거하게 된다. 당시 경찰은 무려 1500명의 음모와 머리카락을 수거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으로 보냈고 이 가운데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와 DNA가 일치하는 범인을 찾아냈다. 하승균 전 총경은 책에서 “당시 수사 기술로는 분석이 불가능했던 DNA 분석기법을 국과수가 앞당겨 도입한 사례가 바로 이 사건”이라며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 홍보 스틸 컷.
영화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박해일이 연기한 ‘박현규’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화성으로 와서 공장 사무실에서 일하는 근로자 설정이니 20대 중반의 나이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두 가지 근거로 그를 주요 용의자로 지목한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라디오에 매번 신청했다는 것인데 이는 영화적인 설정에 불과하다. 두 번째는 피해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의 증언이다. 그의 영화 속 대사다. “그놈 얼굴 안 보려고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요. 팬티까지 씌웠는데도 눈을 꼭 감고 있었어. 얼굴 봤으면 아마 날 죽였을 거에요. 손이 정말 부드러웠어요, 내 입을 막은 손이 정말 여자 손처럼 곱고 부드러웠어요.” 검거된 박현규 역시 손이 매우 부드러웠다. 그렇지만 미국에 의뢰한 DNA 분석 결과는 범인이 아닌 것으로 나온다. 실제 당시 수사팀이 유전자 분석을 의뢰한 것은 미국이 아닌 일본으로 이 부분 역시 영화와 당시 사건의 다른 점이다.
실제 용의자가 특정되면서 영화 속 박현규에게 다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용의자 이춘재 씨가 진범이라면 그는 23세부터 28세 사이에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저지른 것으로 20대 중반이라는 점이 들어맞는다.
영화 속 ‘박현규’라는 캐릭터는 사건 당시 몽타주를 기반으로 창작됐다. 몽타주는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를 통해 제작됐다. 목격자는 영화처럼 백광호는 아니고 시외버스의 운전기사와 안내원이다. 7차 사건 당시 사건 현장 인근에서 버스를 탄 용의자의 인상착의를 목격자들이 구체적으로 진술해 몽타주가 작성된 것.
24~27세의 나이에 스포츠형 머리, 신장은 165~170cm, 갸름하고 보통 체격에 코가 우뚝하고 눈매가 날카로웠으며 평소 구부정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는 유일한 생존자였던 피해 여성의 진술과도 일치했다. 영화에선 끝까지 얼굴을 보지 않았다는 대사가 나오지만 실제 생존 피해자는 얼굴에 거들이 씌워진 상황에서 어렵게 범인의 얼굴을 봤다고 진술했다. 7차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88년으로 용의자 이 씨가 25세 때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