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살인사건 이후, 청주에서도 이어진 살인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사건 현장도. 왼쪽은 실제 당시 형사들이 그린 현장도이며 오른쪽은 이를 토대로 누리꾼들이 만든 자료다. 사진=연합뉴스·인터넷 갈무리
현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점은 이춘재 씨가 화성 토박이라는 것이다. 일요신문이 판결문을 통해 확인한 이춘재 씨의 본적은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진안1리로 현재의 진안동 인근. 당시 사건 현장지도를 살펴보면 10차례의 사건 가운데 다수가 진안1리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서 벌어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6차 사건은 본적 주소와 아주 가까운 지점에서 발생했다. 이후 7차 사건은 비교적 먼 곳에서 벌어졌는데, 이때 버스를 탄 범인을 본 운전기사에 증언에 의해 첫 몽타주가 만들어졌다.
경찰과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이춘재 씨는 1993년 4월 화성을 떠나 충북 청주로 이사할 때까지 줄곧 화성에서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성 사건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발생한 10차례의 연쇄살인이다. 만약 이춘재 씨가 진범이라면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10차례의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경찰 수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주민이었다는 말이 된다.
지금까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이미 교도소 안에 있어서였다. 유력 용의자 이춘재 씨는 이미 20년째 복역 중인 무기수였다. 그는 1994년 1월 처제를 성폭행한 뒤 살해하고 그 사체를 유기한 혐의로 붙잡혀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그의 아내 역시 1993년 12월 가정불화와 가정폭력 등을 이유로 집을 나간 상태였다. 화성을 떠난 이후에도 살인을 멈추지 못한 셈이다.
당시 판결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춘재 씨는 1994년 1월 20세였던 자신의 처제에게 “토스트기를 주겠다”는 말로 회유해 충북 청주시 흥덕구 자택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전날 미리 준비해둔 수십 개의 수면제를 탄 음료수를 건넸다. 이춘재 씨는 음료수를 마시고 잠이 든 처제를 성폭행한 뒤, 망치 등으로 머리를 4회 이상 때리고 목을 졸라 살해했다. 이후 자택에서 약 880m 떨어진 한 철물점 창고에 사체를 유기했다. 발견된 시신의 상태가 여성용 스타킹으로 묶여 싸여 있다는 점에서 화성연쇄살인사건과 유사했다.
이춘재 씨는 “처제의 사망 소식을 처가 식구들의 전화로 통해 알게 되었다”고 혐의를 부인했다. 지은 죄에 비해 형이 무겁다며 항소도 거듭 진행했다. 당시 1, 2심 재판부는 “평소 피고인을 믿고 따르던 처제를 강간, 살해한 후 범행을 은폐하기 위하여 피해자의 사체를 유기한 반인륜적 범죄로 그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면서 “범행이 계획적이고도 치밀할 뿐만 아니라 방법 역시 잔혹하다. 또한 범행에 대하여 전혀 뉘우치는 기색이 없다”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강간은 계획적인 범행으로 볼 수 있으나 이후 살해에 대해서는 사전에 계획했다는 직접적 증거 없다”며 파기 환송했다. 이후 두 차례의 재판 끝에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이춘재 씨의 행적은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춘재 씨는 1991년 7월에 혼인신고를 했다고 한다. 또한 판결문에는 1993년 이춘재 씨에게 두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이즈음 이춘재 씨는 결혼과 아들 출생, 그리고 처가가 있는 청주로 이사 등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20일 CBS와의 인터뷰에서 “2년이 넘는 공백기간 동안 청주 인근에서 스타킹 매듭으로 결박된 여성 강간 살해 시신이 있거나 성범죄 미수에 그친 사건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여죄 여부 가능성에도 주목했다.
#정작 교도소에선 얌전한 1급 모범수
이춘재 씨의 교도소 생활 모습은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씨는 무기징역 판결 이후 대전교도소를 거쳐 현재 부산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춘재 씨는 매우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유영철이나 다른 흉악범죄자들이 교도소 내에서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킨 것과 달리 흔한 징계조차 한 번 받지 않았다는 것. 자신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특정되었다는 보도를 접한 이후에도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음은 물론, 9월 18일 자신을 조사하러 부산까지 내려온 경찰 앞에서도 얌전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반대의 모습도 있었다. 동료 수감자가 부산일보와 한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이춘재 씨는 교도소 사물함에 10여 장의 음란사진을 보관해두고 몰래 보곤 했다고 한다. 교도소 내에서의 음란물 소지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1급 모범수인 이춘재 씨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사진을 숨겼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성적 욕망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 전문가 의견이다. 여기에 남성 재소자 사이에서만큼은 폭력성을 보이지 못했다는 해석도 있다.
면회를 오는 가족과 지인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춘재 씨의 형제와 어머니가 면회를 오는 것은 물론 영치금도 넣어 줬다고 한다. 그런데 1995년 상고심 당시 이춘재 씨의 변호를 담당한 변호사가 법무부 고위직을 지낸 전관 출신이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재력을 가진 집안의 자제가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렇지만 본인이나 가족이 고액의 선임료를 내고 유력한 전관 변호사를 선임한 게 아닌 국선변호사였다. 일요신문 확인 결과 상고심과 이후 재상고심의 변호인도 모두 각각 다른 국선변호사였다. 결국 상고심 당시 지정된 국선변호사가 전관 출신이었을 뿐이다. 이춘재 씨는 경찰조사에서부터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신문에선 당시 변호를 맡았던 전관 출신 변호사를 직접 찾아갔지만 이춘재 씨와 관련한 인터뷰를 일체 거절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전담수사팀은 19일 형사와 프로파일러 7명을 부산교도소로 보내 이춘재 씨를 조사 중이다. 이춘재 씨는 앞서 있었던 1·2차 조사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경찰은 나머지 사건 증거물에 대해서도 DNA 감식을 통해 혐의를 입증하고 자백을 이끌어 내겠다는 입장이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