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세 젊은 나이에 총에 맞아 사망한 피셋 페아클리카.
미모와 재능을 인정받으며 빠른 시간 안에 스타덤에 올랐던 페아클리카는 1990년대 캄보디아를 대표하는 셀러브리티(셀럽·유명인)였다. 동료 배우였던 카이 프라셋과 1990년에 결혼해 1992년 첫 아이를 낳은 후 60여 편의 영화와 수많은 광고에 출연한 페아클리카는 영화뿐만 아니라 무대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인도, 태국,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중국, 한국, 일본,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 미국 등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북미 지역까지 그녀는 배우로서 혹은 댄서로서 무대를 확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경력은 갑작스레 중단된다.
1999년 7월 6일, 페아클리카는 7세 조카와 함께 캄보디아 프놈펜에 있는 오러시 시장에서 쇼핑을 하던 중, 신원을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저격을 당한다. 대낮에 벌어진 총격 사건. 그녀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고 일주일 동안 소생의 기적을 바라며 중환자실에 있었지만 7월 13일 새벽에 사망한다. 장례식이 치러졌고 1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캄보디아 역사상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시민들이 모여든 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공권력은 무력했다. 경찰은 단 한 명의 용의자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상한 건 목격자였다. 열린 공간이었기에 분명 사건 현장을 본 사람이 있었지만, 캄보디아 최고의 셀럽이 목숨을 잃었던 현장이었음에도, 목격자로 나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3개월 뒤 반전이 일어난다. 프랑스 언론 ‘렉스프레스’는 죽은 페아클리카의 일기를 입수해 분석했고, 캄보디아의 훈 센 총리와 그녀가 내연관계였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총리의 아내 분 라니가 질투심에 불타 살인을 사주했다는 내용을 보도한다. 기사에 의하면 그들은 1998년 8월에 처음 만났고, 두 사람 모두 결혼한 상태였지만 첫눈에 사랑에 불탔으며, 13세의 나이 차이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훈 센 총리는 페아클리카에게 집과 돈을 제공했고, 남편과 빨리 이혼하도록 사법부에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후 아내 분 라니에게 불륜 사실을 들킨 훈 센 총리는 이혼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분 라니는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이 페아클리카에게 비밀리에 준 재산을 몰수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목숨을 노렸다. 일기엔 당시 경찰국장이었던 혹 렁디의 경고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다른 나라로 떠나지 않으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그 경고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훈 센 총리와 그의 아내 분 라니.
총에 맞아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페아클리카는 주변 지인들에게 “나를 죽이려 한 사람은 바로 분 라니”라고 말했다고 하니, 범인은 거의 확실한 셈이었다. 기사를 접한 분 라니는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렉스프레스’는 만약 법적 조치가 행해진다면 법정에서 추가 증거를 제시하겠다고 맞섰다. 그들은 사건의 목격자를 확보했고, 관련 문서를 입수했으며, 훈 센 총리가 페아클리카에게 선물로 주었던 개인 물품도 증거물로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일기장은 이미 필적 감정과 지문 분석으로 페아클리카라는 것이 증명된 상태였다. 불리함을 느낀 분 라니는 ‘렉스프레스’를 고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페아클리카의 죽음은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인권단체는 캄보디아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서 이 사건을 공론화했다. 2003년엔 ‘피셋 페아클리카: 진실과 공포의 이야기’라는 책이 발간돼 화제를 일으켰지만, 서점에 잠복한 사복 경찰들에 의해 판매 금지가 되었다.
2006년에 사건은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경찰부국장이었던 행 포우가 자신의 상관인 경찰국장 혹 렁디의 행동을 폭로한 것. 포우에 의하면 분 라니의 사주를 받은 혹 렁디가 자신의 경호원을 시켜 페아클리카를 죽였다는 것이다.
폭로 이후 행 포우는 핀란드로 망명 신청을 했는데 출국 직전에 명예훼손죄로 체포돼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당시 사건의 실질적인 설계자인 경찰국장 혹 렁디는 2008년에 갑작스러운 헬기 사고로 사망했다. 결국 이 사건은 영원히 진실을 밝힐 수 없게 되었고,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의혹은 결국 해소되지 못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