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을 함께 이끌던 동료에서 각각 베트남과 중국 감독으로 만난 박항서 감독(왼쪽)과 히딩크 감독. 사진=베트남축구협회 홈페이지 캡처
[일요신문] 거스 히딩크. 대한민국 축구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히딩크 감독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전설적인 4강 진출을 이끌었다. 지금까지도 국내에는 그를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팬들이 존재할 정도다. 축구 선수, 지도자 정보를 공유하는 한 유명 해외 사이트의 ‘시민권(citizenship)’란에는 그의 조국 네덜란드와 함께 한국이 기입돼 있기도 하다.
#중국서 불명예 안은 대한민국 영웅
국내에선 영웅으로 추앙받는 히딩크 감독이 최근 이끌던 팀에서 또 한 번 시련을 겪었다. 지난 20일 중국 올림픽 축구대표팀의 경질 통보를 받은 것. 지난 10여 년간 터키, 안지 마하치칼라, 네덜란드 등을 거치면서 감독 커리어의 내리막길에 들어선 히딩크 감독에게 감독 부임 후 불과 1년 만에 이뤄진 이번 경질은 치명타가 될 전망이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과 대결에서 0 대 2 완패가 뼈아팠다. 박 감독 부임 이후 베트남이 연령대 대표팀과 A대표팀 모두 일부 성과를 거두고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중국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아왔다. 베트남에 패하자 히딩크 감독에 대한 중국 내 여론이 급격히 돌아섰다. 같은 시기 북한과 1 대 1 무승부에 머물면서 경질 여론에 채찍을 가했다.
결과만 나쁜 것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도 ‘히딩크 vs 박항서 맞대결’로 관심을 모았던 베트남과 친선전은 일부 주전선수가 빠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무기력한 패배였다. 전반부터 후반 중반까지 베트남은 중국의 오른쪽 측면을 줄기차게 공략했다. 2골 또한 이 지역에서 시작된 공격에서 비롯했다. 중국은 0 대 2로 뒤진 후반 막판에야 공격에 열을 올렸지만 끝내 베트남 골문을 열지는 못했다. 앞서 히딩크는 강호들에도 승리를 따내지 못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지난 1년간 멕시코,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등을 상대로 모두 비기거나 패했다. 아시아 중상위권으로 평가받는 우즈베키스탄에도 무승부에 그쳤다.
물론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중국 올림픽 축구대표팀은 2020 도쿄올림픽 1차 관문을 통과해놓은 상태였다. 지난 3월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예선을 조 1위로 통과하며 본선에 진출했다. 본선 성적에 따라 올림픽 티켓을 거머쥘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도 씁쓸함을 남겼다. 중국은 2승 1무로 조 1위를 차지했지만 약체 라오스와 필리핀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이었다. ‘축구 변방’ 말레이시아와 2 대 2 무승부를 기록했고 이는 히딩크 감독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
AFC U-23 챔피언십 본선은 오는 2020년 1월 초 개최 예정으로 불과 3개월을 남겨두고 있다. 상위 3팀에만 올림픽 출전권을 얻을 수 있는 ‘실전’을 앞두고 중국은 감독 교체라는 극단적 카드를 꺼내 들었다. 거스 히딩크라는 세계적 감독의 이름값도 그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페인을 이끌며 2002 한일 월드컵 8강에 올라 국내팬들에게도 익숙한 카마초는 중국에서는 웃을 일이 많지 않았다. 연합뉴스
사실 히딩크뿐 아니라 그간 많은 감독들이 중국에서 고배를 마셨다. 세계적인 명성의 감독들의 ‘잔혹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월드컵 본선 진출을 염원하던 중국은 2000년대 접어들어 세르비아 출신 보라 밀루티노비치 감독을 불러 들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나섰다. 다만 예선 과정에서 한·일 양국과 중동 강호들을 피하는 행운을 맞았기에 평가 절하된 면은 있었다. 실제 본선에선 3전 전패(0득점 9실점)했다. 밀루티노비치는 이전까지 4번의 월드컵에서 맡은 팀을 모두 16강에 진출시킨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출신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도 중국에서 상처를 입은 감독 중 한 명이다. 전설적인 선수 출신이자 2002 한·일 월드컵 8강전에서 한국 대표팀의 상대 스페인 팀의 감독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을 노리는 중국 축구대표팀에 부임했지만 최종예선조차 진출하지 못하는 수모를 겪으며 지휘봉을 놓아야 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을 목표로 나선 알랭 페랭(프랑스)도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했다. 카마초와 마찬가지로 월드컵 예선 과정에서 최종예선 탈락 위기를 겪었고 결과를 받아들이기도 전에 중국축구협회는 경질을 선택했다.
공교롭게도 이들 3명은 모두 감독 커리어에 내리막을 걷던 인물들이었고 터닝 포인트로 중국을 택했다. 비록 중국이 축구 약체로 평가받지만,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작은 성공으로도 많은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에서 실패한 후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밀루티노비치, 카마초, 페랭 3인 모두 현재 ‘무직’ 상태다. 1년 만에 직장을 잃은 히딩크 또한 향후 반등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 명장 마르셀로 리피는 중국 대표팀의 경기력에 실망해 팀을 떠났다가 3개월만에 귀화 정책과 함께 돌아왔다. 사진=대한축구협회
현재 중국 A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마르셀로 리피(이탈리아)는 잔혹사가 ‘현재 진행형’인 감독이다. 국가대항전인 월드컵부터 이탈리아 세리에A, 유럽챔피언스리그, 아시아 무대까지 1990년대 중반부터 쉼 없이 우승을 거머쥔 인물이다. 하지만 2014년 이후 우승컵 수집이 끊겼다. 중국 국가대표 지휘봉을 잡았기 때문이다.
리피 감독이 중국 대표팀에 부임할 당시, 중국은 2018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이에 중국에서는 그의 진가를 발휘할 무대로 올해 초 열린 아시안컵을 점찍었다. 중국은 아시안컵에서 8강에 올랐지만 이란에 0 대 3으로 패하며 탈락했다. 대회 이후 리피는 팀이 보인 무기력함에 실망감을 드러내며 팀을 떠났다.
하지만 중국과 리피의 재회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제자 파비오 칸나바로에게 사령탑 자리를 맡겨뒀던 그는 약 3개월 만에 중국 대표팀으로 돌아왔다. 그의 복귀에는 파격적인 조건이 달렸다. 리피는 중국축구협회 측에 우수 외국인 선수의 중국 귀화 및 대표팀 합류를 요청했다. 이에 지난 6월 친선경기에는 중국과 키프로스 혼혈 니코 예나리스(중국명 리커)가, 9월 열린 월드컵 예선전에는 순수 외국인 엘케손(중국명 아이커썬)이 중국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나섰다.
축구 강국을 꿈꾸는 중국은 지금까지 외국인 감독과 악연을 이어왔다. 역대 중국 축구대표팀 감독 중 가장 뛰어난 커리어를 갖고 있는 마르셀로 리피 감독이 중국의 ‘감독 잔혹사’를 끊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