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오로팀 감독과 선수 8명(바둑리그+퓨처스리그). 왼쪽부터 문유빈, 설현준, 홍성지, 송규상, 나현, 한웅규, 양건 감독, 강창배, 최광호 선수. 사이버오로팀 감독: 양건 바둑리그 선수: 나현(1지명) 홍성지(2지명) 설현준(3지명) 문유빈(4지명) 송규상(5지명) 퓨처스리그 선수: 최광호(1지명) 한웅규(2지명) 강창배(3지명) |
[일요신문] 지난 7월 초, 뜨거운 여름이었다. 전북 부안에 대회 취재를 갔다가 우연히 그를 만났다. 당시 얼굴엔 무료함과 피곤함이 살짝 깃들어 있었다. 학교 선생님은 그만뒀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고 말한다. 이제 뭘 할 거냐고 물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이젠, 좀 쉬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운명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이번에는 바둑리그 감독이 되었다.
2019-2020 KB국민은행 바둑리그 개막식이 9월 24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렸다. 바둑리거만 45명, 퓨처스리거까지 국내 최고수 72명이 참가해 6개월 동안 매주 대국을 하는 매머드급 기전이다. 마지막에 참가를 결정한 아홉 번째 팀은 사이버오로. 회사명은 ‘세계사이버기원’. 인터넷 바둑보급을 목적으로 2000년 한국기원 주도로 설립한 온라인 바둑회사다. 사이버오로는 국내 3대 바둑리그에 모두 참가한 유일한 구단이 되었다. 2012년 KB바둑리그, 2017, 2018년 시니어바둑리그, 2019년 여자바둑리그와 KB바둑리그에 들어왔다.
올해 사이버오로팀 감독을 맡은 양건 9단.
개막식에서 만난 한종진 감독(한국물가정보)은 “내가 예전 사이버오로팀 감독이다. 우리 팀과 맞붙으면 특별히 교육해 주겠다. 짜릿한 승리로 전임 감독이 가진 위엄을 보여주겠다. 예전 양건 감독이 이끄는 팀은 항상 하위권이었다. 올해도 선수들은 훌륭한데 감독이 부실해서 저조한 성적이 예상되기에 매우 안타깝다. 감독 멘탈이 워낙 약하다”라며 한껏 긁었다. 후배 감독의 독설에 양건은 마냥 웃었다. 둘은 늘 이런 장난을 주고받는 친한 사이다.
이에 양건은 “한종진 감독이 많이 컸다. 어릴 때부터 나를 우상으로 바라보며 살아온 귀여운 후배다. 항상 양건이 하던 걸 탐내며 나도 저 자리에 가고 싶다고 꿈꾸던 아이다. 예를 들면 전국체전 감독직을 하다 그만두면 후임으로 한종진이 그 자리에 들어오는 식이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그는 이미 바둑계에선 거물이 되었다”면서 “그리고 내가 멘탈이 약했던 건 사실이다. 감정에 기복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정말 냉정해졌다”고 말한다.
오랜만에 바둑리그에 돌아온 소회를 물었다. “과거 처음 감독을 했을 때는 준비도 덜 되었다. 그만두고 나서야 생각이 드는 아쉬운 면이 아주 많았다. 특히 선수를 대하는 방식이다. 연구생 지도사범을 거치고, 학교 현장을 누비면서 많은 점을 느꼈다. 당시엔 선수들을 너무 방치했다. 프로라면 자신을 혼자서 컨트롤해야 하고, 감독이 세세하게 간섭하는 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선수들 컨디션과 생각을 감독이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대국상대에 대한 분석 등도 감독의 몫이다. 내 장점은 현재 다른 일이 없어서 감독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팀원들과 회의 중인 양건 감독. 왼쪽부터 홍성지, 양건, 설현준.
어떻게 팀을 이끌 예정인가. “학교(순천 바둑고등학교)에선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섬세하게 신경을 많이 쓰더라. 나는 세심한 성격이 아니다. 무신경하고 게으르다. 그래도 우리 팀을 이끄는 게 아니라 잘 섬기겠다. 서번트(하인) 리더십이라고 불러달라. 스스로 알아서 극복하는 선수와 어려울 때 방황하는 선수를 잘 구분하겠다. 개인 성향에 따라 섬세하게 보살피겠다.”
지난 선수선발식을 복기하면? “3지명에서 설현준과 최정을 놓고 고민했다. 최정 선수가 바둑리그에선 검증이 안 돼서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두는 거나 공부하는 자세로 봤을 때 3지명으로 뽑아도 충분했다. 자기보다 강한 상대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선수다. 살짝 후회한다. 사실 설현준은 내가 잘 모르는 선수였다. 작년 바둑리그 성적이 그리 좋진 않았는데 자기만의 포텐셜이 있다고 느꼈다.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시기에 와 있고, 내가 그걸 끌어주고 싶다.”
팀원들을 쭉 보면 뭔가 돋보이는 조합은 아니다. 선발 기준이 뭐였나. 강한 캐릭터나 개성 있는 선수들로 재미있는 팀을 꾸릴 수는 없었을까. “이미 해봤다. 사실 7년 전, 감독으로 일했던 넷마블은 콘셉트가 재미난 팀이었다. 이창호, 박지은 등 개인적으로 친한 선수들과 리그를 함께했다. 이번 선발기준은 당연히 실력이다. 더 어리고 현재 노력을 많이 할 것으로 판단되는 기사를 선택했다. 1, 2, 3지명까진 지난 바둑리그 성적을 많이 참고했다. 4, 5지명은 내가 연구생 지도사범 시절부터 잘 알던 유망주들이다. 일견 멤버구성이 화려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제 관점에선 올해 정확하게 성적을 낼 수 있는 선수만 뽑았다. 지난 시즌을 마치고 꽤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AI(인공지능)가 있어 공부량에 따라 개인의 실력이 압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대다. 짧은 시간에도 바둑실력이 질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아마 우리 팀뿐 아니라 올해 바둑리그에선 많은 하위 랭커가 이변을 일으키리라 본다.”
사이버오로팀 2지명 홍성지 선수. 9월 20일 열린 참저축은행배 결승에서 신민준(한국물가정보팀 1지명)을 꺾고 우승했다.
양건 감독은 “최근 경사가 있었다. 2지명, 나이로 맏형인 홍성지 선수가 국내기전(참저축은행배)에서 신민준을 꺾고 우승했다. 내가 보는 눈이 아주 이상하지 않다는 걸 증명해준 셈이다. 내가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선수들 세세한 컨디션이나 실력에 대해선 확신하지 못했었다. 이번 홍성지 우승을 보며 강력한 자신감이 생겼다. 바둑리그에선 서로 믿으며 이기는 스크럼을 짜면 팀이 급격히 강해질 수 있다. 사이버오로팀 선수들 모두 믿을 만하다”고 말한다.
사이버오로는 1라운드 휴번이다. 각 팀 전력을 살피며 호흡을 고를 여유가 있다. 첫 무대(2라운드)에서 맞붙을 상대는 박정환을 보유한 화성시코리요팀이다. 마지막으로 감독의 오더실력을 테스트했다. 질문은 ‘만약 여자 최정 선수(셀트리온)가 언제 나올지 안다면 누구를 내보내야 할까’다. 양건은 “답은 홍성지다. 유부남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번 참저축은행배 4강에서 그 점을 증명했다. 홍성지가 2지명 선수지만, 최정만 잡을 수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다. 나현은 절대로 안 된다.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라면서 웃었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