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담배를 피우는 미국 남성. 사진=연합뉴스
최근 미국에서 ‘액상형 전자담배’ 사용이 원인으로 의심되는 중증 폐질환자와 사망자가 속출했다. 전자담배는 크게 궐련형과 액상형으로 나뉜다. 궐련형은 담뱃잎에다 첨가물을 넣은 것을 고열에 쪄 그 기체를 마시는 방식이다. 액상형은 니코틴이 들어있는 액체를 가열해 그 기체를 마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코스, 릴, 글로 등이 궐련형이고 쥴, 릴 베이퍼 등이 액상형이다. 당장 문제가 된 것은 액체를 가열해 쓰는 전자담배 중에서도 가향 제품을 사용했을 경우다.
환자들은 대부분 기침을 하거나 호흡곤란, 가슴통증을 호소하는 등 호흡기 이상증세를 보였다. 일부는 구토나 설사를 하기도 했고 발열이나 체중감소 등의 증상을 겪기도 했다.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환자들의 폐질환은 감염이 아닌 화학적 노출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9월 20일 기준 중증 폐질환 사례는 530건, 사망사례는 8건에 달한다. 중증 폐질환 사례의 대다수는 대마 유래 성분인 THC(Tetrahydroannabinol)와 니코틴을 혼합한 액상형 전자담배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THC는 대마초 성분 중 환각을 일으키는 주성분이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국은 강력한 판매중단 조치를 내렸다. 연방검사와 연방거래위원회, 주 변호사 등은 액상형 전자담배사에 대한 수사 및 조사에 돌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종류의 가향 전자담배를 금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뉴욕주와 미시간주는 과일향 등 가향 담배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를 즉각 취했다. 미국 최대 유통업체인 월마트 역시 담배 구매 최소 연령대를 높이고, 모든 매장에서 가향 전자담배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는 사용 자제 ‘권고’뿐, 원인불명이 가장 무서워
우리 정부는 9월 20일 국민건강증진정책심의위원회 금연정책전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액상형 전자담배 사용을 자제할 것을 권고했다. 권고안은 “액상형 전자담배는 중증 폐질환 및 사망을 초래할 수 있을 것으로 의심되므로, 모든 국민은 액상형 전자담배를 사용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액상형 전자담배와 폐질환의 인과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피해가 속출하자 우선 사용 자제를 권고한 것.
사망자까지 나온 상태지만 국내에는 관련 법규가 없어 진상파악조차 쉽지 않다. 게다가 액상형이 문제인지 가향 담배가 문제인지 가려지지 않았다. ‘가향’ 자체가 문제라면 궐련형 가향 담배도 폐질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전자담배 논란에 정부는 ‘증세정책’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국민 건강에 직결되는 이슈에 증세카드를 꺼낸 이유는 담배사업 주무부처가 기획재정부이기 때문이다. 담배사업 허가권이 기재부에 있고 관련법은 담배사업법을 따른다. 담배사업법 시행령을 살펴보면 담배제조업자에 요구되는 여러 조항이 있지만 건강이나 담배의 유해성에 관한 조건은 전무하다.
아이코스가 국내 처음 시판됐을 때도 담배의 성분이나 유해성, 안전성에 대해서는 사전에 심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시판된 뒤에야 기획재정부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궐련형 담배에 대한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지난 5월 국내 출시된 쥴 역시 시판 뒤 보건복지부가 성분 분석을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의뢰했다. 선 판매 후 점검을 하는 셈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관련부처에서 의뢰가 들어오면 식약처가 일을 하는 구조고, 사전에 주도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며 “궐련형 성분 분석에 1년여 기간이 걸린 만큼 액상형 전자담배도 조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제법 시간이 들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각) 백악관 집무실에서 가향 전자담배 금지 계획을 발표했다. 사진=연합뉴스
담배회사를 향한 비난 여론도 커지고 있다. 특히 미국의 액상형 전자담배 시장 1위인 쥴랩스 사가 도마에 올랐다. 2015년 쥴랩스의 액상형 전자담배 쥴(JUUL)이 출시된 이후 미국 10대를 중심으로 흡연자가 급증했다. 쥴은 기기가 USB 모양으로 휴대가 간편해 청소년 흡연자 급증을 야기한 주범으로 꼽히기도 했다. 더군다나 액상형 전자담배는 과일향, 우유향, 캔디향 등 향이 첨가돼 담배에 거부감이 있는 신규 흡연자와 여성, 청소년 유입에 성공했다.
담배회사들은 SNS를 적극 활용해 홍보해왔다. 전자담배 흡연이 유행에 맞고 멋지다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일례로 전자담배를 핀다는 의미의 신조어 ‘Juuling’이 만들어졌을 정도다. 지금도 SNS에는 쥴을 홍보하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가 줄을 잇는다. 그중 일부는 계정 아이디에 쥴을 넣은 경우도 있은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신체에 ‘JUUL’이라는 글자를 문신으로 새기는 영상을 올린 사람도 포착됐다.
물론 사측의 홍보비 지원 없이 쥴의 홍보대사를 자처했을 가능성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행에 민감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과도한 마케팅을 했다는 의혹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연방거래위원회는 유명인을 내세운 마케팅 과정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에 대해 쥴 관계자는 미국 언론에 “30세 이상 성인 인플루언서를 1만 달러 이내의 돈을 주고 고용했으며 인원도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미국의 수사당국이 폐질환자가 어떤 전자담배를 사용했는지 세부 정보는 밝히지 않아 전자담배업계 전반에 파장이 미칠 것으로 보인다. 우리 국회는 다가올 국정감사에 전자담배 논란을 살펴볼 것으로 전해진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우재준 쥴랩스코리아 상무와 김정후 KT&G NGP 개발실장을 증인 명단에 올렸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