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성평등 정책을 발표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사진=연합뉴스
성인지 예산은 편성 과정에 성평등 관점을 적용함으로써 모든 국민이 성차별 없이 국가 재원의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게 그 취지다. 예산 편성과 집행 과정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미리 분석하고 평가해 기존 제도에 반영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별한 제도는 아니다. 1995년 유엔 세계여성대회에서 주요 의제로 채택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앞다퉈 도입했고 현재 미국, 캐나다, 영국 등 세계 주요 70여 개국에서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0년부터 도입해 올해로 10년 차다.
존재감은 없지만 덩치는 결코 작지 않다. 지난 5년 동안 쓰인 성인지 예산은 총 147조 1113억 원이다. 이는 지난 10년간 사용된 저출생 예산 140조 원보다도 더 큰 규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비교해보자. 정부가 발표한 내년도 성인지 예산안의 대상사업은 284개, 총 31조 7963억 원에 달한다. 내년도 일자리 예산이 25조 8000억 원이라는 점과 비교해보면 성인지 예산은 무관심 속에 묻혀 있기에는 아까운 규모의 예산이다.
문제는 이 많은 돈이 제대로 쓰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정부가 매년 20조~30조 원의 돈을 성인지 예산으로 책정하고 있지만 실상은 엉뚱한 곳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성차별을 없애겠다는 본래 목적과 달리 성평등과 무관한 사업들의 자금줄로 전락한 것이다.
이는 2019년 예산안을 뜯어보면 더 명확히 보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올해 ‘스마트워크 활성화 기반조성’과 ‘이공계전문기술인력양성’ 사업에 각각 6억 3800만 원과 119억 2700만 원을 썼다. 이공계 분야에서 여성 인재를 키우겠다는 의도로 볼 수도 있겠으나 정책 대상을 한정하지 않아 남성이 사업수혜자의 75.6%를 차지하는 결과가 나왔다.
농림축산식품부는 한국농수산대학교 운영비 405억 7700만 원을 성인지 예산으로 지급했다. 농어촌 발전을 선도할 농어업인력을 양성하겠다는 것인데 국회예산처는 한국농수산대학교 운영 사업의 수혜자는 성별에 대한 고려보다는 지원자의 객관적 역량에 대한 고려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성인지 사업으로 분류하기 부적절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법무부는 ‘법교육 연수 및 체험프로그램’을 만들면서 26억 9100만 원을 사용했는데 이 역시 성인지 예산에서 쓰였다. 건전한 법문화 형성을 위한 법교육 체험 및 연수 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깨닫고 준법의식을 고양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여기서는 정책 대상이 아예 어린이와 청소년, 일반시민으로 되어 있다.
이외에도 국토교통부의 ‘도시활력증진지역개발’사업과 경찰청의 ‘수사경찰전문교육’ 등 성별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기 어려운 사업에 성인지 예산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에 대해 한 국회 관계자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게 성인지 예산이다. 성평등과는 무관한 사업도 수혜 대상자를 성별로 갈라 표기하면 성인지 예산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가족부의 검토 의견을 받는 중앙정부의 성인지 예산제도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지방자지단체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기 때문이다. 조례에 따라 예산 행정이 제각기 운영되고 감시 주체마저 전무하다. 지자체의 경우 2012년 전주시를 시작으로 이 제도를 시범 적용하기 시작했는데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의 ‘2012년 전주시 성인지 예산 사업 분석 결과’에 따르면 전체 37개의 사업 가운데 다수의 사업목적이 구체적이지 않으며 사업 대상자와 수혜자의 산출에 근거가 없고 성별격차 원인을 분석하는 방법 역시 주먹구구식이었다.
또한 서울시 강남구는 ‘안전한 어린이 공원’ ‘녹색주차장마을 조성 사업’ ‘구립도서관 환경 개선’ 등을 성인지 예산 대상 사업으로 시행했다. 사업 수혜자가 여성을 포함한 불특정 다수라는 이유였다. 2019년 강남구의 성인지 예산은 269억 5300만 원이다.
서초구의 경우 가로수 정비를 위한 공사비 32억 원을 성인지 예산으로 편성했다. 기대하는 성평등 효과는 ‘주민 만족도 제고’였다. 이외에도 구청 소식지, 노인 무료 급식, 비누 만들기, 뜨개질 수업 등 성평등과는 무관한 사업들이 성인지 예산으로 둔갑되어 쓰이고 있었다.
서울시 성평등 정책 사업을 모니터링하는 ‘젠더 거버넌스’로 활동 중인 강근정 활동가는 “지자체에서 시행 중인 성인지 예산 대상 사업은 오히려 성차별을 조장하고 있다. 뜨개질 수업이 어떤 면에서 성평등 사업이 되는지 모르겠다. 이 가운데에는 경력단절 여성도 있을 텐데 이들이 왜 집에 있게 되었는지를 고민조차 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자는 성인지 예산제도의 본래 취지에서 매우 어긋난 행정이다”라고 말했다.
서초구 관계자는 “해당 사업은 성평등 효과와 크게 관계는 없으나 주부의 인식 개선과 습관 변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무자 역시도 시행 사업과 예산의 목표 간 관련성이 거의 없었음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원인에 대해 강근정 활동가는 “성인지적 관점이 없는 상태에서 성인지 예산 사업을 단순히 참여자 성비만 맞추면 된다고 생각하는 기계적인 실무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 성평등을 1차 목적으로 하는 직접 목적 사업보다 사업 수행의 결과가 간접적으로 성평등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되면 성인지 예산 사업으로 인정해주는 간접 목적 사업이 월등하게 많은 것도 문제다. 대부분의 문제가 간접 목적 사업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문제점을 인식한 정부도 대책 수립에 나섰다. 2020년도 성인지 예산안에 성평등 추진 중점사업이 추가된 것이다. 성평등 목표 달성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는 사업으로만 구성했다. 사업 선정의 적정성과 성인지 예산의 실효성의 논란 반복을 의식한 결과다. 그러나 이러한 중점 사업의 예산마저도 전체 성인지 예산의 0.6%인 1780억 원밖에 되지 않아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평가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