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거래소 빗썸에 따르면, 지난 24일 오후 8시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비트코인 가격은 25일 오전 4시 30분쯤 900만 원 대로 폭락하면서 1000만 원 선이 무너졌다. 사진=빗썸 화면 캡처
암호화폐 거래소 빗썸에 따르면 지난 24일 오후 8시 기준 비트코인 가격은 1159만 원에서 조금씩 떨어지더니 25일 오전 3시 30분 1053만 원으로, 한 시간이 지난 4시 30분엔 969만 원으로 계속 폭락하면서 1000만 원 선이 무너졌다. 시가총액 2, 3위인 이더리움과 리플의 가격도 함께 급락했다. 25일 오전 3시까지만 해도 22만 원이던 이더리움은 오전 4시 30분 18만 원으로 떨어졌다. 리플도 같은 날 오전 3시 309원에서 4시 30분 275원으로 하락했다. 연이은 폭락에 이날은 암호화폐 시장의 ‘검은 수요일’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리플의 최근 시세도 27일 오후 1시 기준 각각 964만 원, 19만 원, 288원으로 하락세다.
암호화폐들의 이례적 폭락에 업계 안팎에선 다양한 해석을 쏟아냈다. 먼저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 산하 국제회계기준(IFRS) 해석위원회가 지난 6월 영국 런던 회의에서 암호화폐를 화폐나 금융상품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이 나왔다. IFRS 해석위원회는 암호화폐는 매매·거래는 가능하지만 현금처럼 고정적이고 확인 가능한 자산으로 인식하기는 어렵다는 이유로, 금융자산이 아닌 무형자산으로 분류했다. 무형자산은 영업권이나 특허권 같은 비화폐성 자산으로, 현금은 물론 은행 예금·주식·채권·보험 등 금융상품과 다르다. 이런 판단이 한국회계기준원과 금융감독원을 통해 지난 23일 우리나라에 알려지면서, 국내 암호화폐의 제도권 진입이 요원해지고 실질적 활용가치가 떨어졌다는 판단이 시장에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반면 암호화폐 가격 폭락을 이들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IASB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130여 개국이 사용하는 회계기준을 만들지만, 암호화폐 산업에서 영향력이 큰 미국·일본·중국은 빠져 있어 전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분석이다. 아울러 무형자산이라고 해도 자산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일본과 미국은 이미 암호화폐 자산 가치를 인정해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 암호화폐 업계 한 관계자는 “국제회계기준이 가격 급락의 일시적 요인일 순 있어도 시장 자체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라며 “암호화폐 자산성을 부정한 것도 아닌 데다 그간 금융권은 암호화폐에 보수적이었기에 업계에선 이번 판단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 주요 암호화폐 가격이 하루아침에 폭락하면서 암호화폐 전망이 어둡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암호화폐 폭락의 원인을 ‘큰손’이 대규모 물량을 쏟아낸 데서 찾는다. ‘고래’라 불리는 대규모 투자자와 기관투자자들이 한꺼번에 많은 코인들을 쏟아내면서 불안해진 개인 투자자자들이 덩달아 팔아치우며 시세가 급락했다는 것. 의도적으로 대량 투매한 뒤 시세를 끌어내려 개인 투자자들이 떨어져 나가게 만들고, 추후 암호화폐를 저가에 대량 매입해 다시 시세를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차익을 누리려는 전략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와 관련, 암호화폐 파생상품 등 단기 투자가 활성화하면서 선물이 현물을 흔드는 ‘웩더독(Wag the dog)’ 현상이 일어났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와 시카고옵션거래소(CBOE) 등 해외 거래소들이 비트코인 선물거래를 시작하면서, 여기에 참여한 고래와 기관투자자들이 더 많은 차익을 내기 위해 옵션 만기일 직전을 기점으로 ‘작전’을 펼쳐 비트코인 가격을 떨어뜨렸다는 의견이다.
한국블록체인협회 블록체인캠퍼스 전임 학장인 최화인 금융감독원 자문위원 겸 부산 블록체인특구 운영위원은 “가격 변동이 큰 암호화폐는 파생상품을 통한 고수익 투자가 가능해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이지만, 기관투자자 유입, 유력 금융기업 진출, 대량 매수·매도 등 변수에 취약해 특정 세력에 시세가 조종될 가능성이 높다”며 “암호화폐 가격 상승이 예측되는 흐름 속에서 최근 급락한 것은 파생상품이 현물시장을 흔들기 때문”이라며 “파생상품시장을 컨트롤하는 기관투자자와 고래들이 결탁해 나타나는 현상으로 향후 반복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봤다.
세계 금융시장의 불안정성 등을 이유로 암호화폐 시장 규모는 커지겠지만 이더리움․리플 등 모든 암호화폐가 호재를 누리기 보다는 기술력과 확장성에서 경쟁력 있는 소수 알트코인들만 살아남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사진=연합뉴스
최근 흐름에도 불구하고 암호화폐 시장의 앞날은 여전히 밝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우선 현 금융시장의 불안정성 확대로 암호화폐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 국내외 경제 불안정성이 커질수록 자산 리스크 헷지를 위해 비트코인 구매 수요가 늘어날 것이며, 이는 암호화폐 시장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최화인 위원은 “비트코인의 탄생은 2008년 금융위기 때 드러난 국가와 중앙은행의 인위적 시장 개입에서 자유롭게 유통할 수 있는 화폐를 마련하려는 데서 이뤄졌다”며 “통화 가치를 보장하지 못하고 돈 추가 발행 등 양적 완화를 통해 경제 불안 부담을 다른 주변국과 국민들에게 이전시켰던 중앙정부의 부도덕한 경제체제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앞으로 그 가치가 실현되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봤다. 최 위원은 다만 “시장 규모 자체는 커지겠으나 모든 암호화폐가 호재를 누리긴 힘들 것“이라며 ”이미 금융자산으로 공인된 비트코인을 제외하면 기술력과 확장성에서 경쟁력 있는 소수 알트코인들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페이스북 등 대기업의 암호화폐 출시도 시장을 긍정적으로 내다보게 하는 이유다. 이들의 잇단 진출은 관련 시장을 급성장시키는 촉매제가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가 발행 예고한 리브라는 여러 외환과 단기 국채 등 실물 자산을 연동해 화폐 가치를 정하는 스테이블 코인으로, 비트코인과 달리 가격 변동성이 적다. 아울러 페이스북 등 플랫폼을 기반으로 리브라를 구입한 뒤 비자·이베이·우버 등 28개 회원사의 서비스와 상품을 이용할 수 있어, 화폐 보유 공간과 소비 공간이 일치해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네이버와 카카오 역시 이런 효과를 누리고자 각각 일본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에서 최근 자체 암호화폐를 발행했다.
민간 대기업들이 활발하게 진출해 경쟁하면, 암호화폐를 견제하는 각국 금융당국도 시장을 선점하고자 암호화폐를 제도화하는 등 길을 터줄 것이란 예상이 적지 않다. 최 위원은 “리브라가 내년 출시되면 세계 중앙은행들도 디지털통화(CBDC) 발행에 속도를 내면서 플랫폼 통화와 각국 중앙은행의 CBDC간 치열한 대결이 예상된다”며 “세계 금융시장은 종이화폐에서 암호화폐와 CBDC를 포함한 다양한 디지털화폐로 전환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