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사건의 시그니처가 보이지 않았던 10차 사건. 사진=연합뉴스
화성연쇄살인사건 발생 당시 경찰은 화성사건의 범인이 B형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수사를 이어갔다. 9차 사건 피해자의 옷에서 범인의 것으로 의심되는 체액이 나왔고 이를 분석한 결과 B형이라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9차 사건 당시 분석을 맡은 최상규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유전자분석과장은 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피해자의 블라우스 조각에서 살짝 묻힌 정도의 정액 반응이 나왔다. 직접 혈액형 검사를 해봤는데, 틀림없이 정확하게 B형이 나왔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춘재의 혈액형이 O형이라는 점이다. 그는 10월 1일 자신의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이 때문에 화성사건의 진범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혈액형에 대한 의혹을 풀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공범 가능성도 열어둬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춘재의 갑작스런 자백이 행여 공범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될 정도다.
화성사건에 공범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된 추정이다. 프로파일러 배상훈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는 “B형이라는 당시 분석이 잘못됐을 수 있다”고 말하는 한편 “9건의 사건 가운데 범행 패턴이 다른 것들이 몇 건 있다”고 말했다.
1, 2, 10차 사건의 경우 DNA 증거물이 나온 5, 7, 9차 사건과 다른 범행 패턴을 가지고 있다. 재갈을 물리거나 피해자의 손을 묶는 등 화성연쇄살인사건만의 시그니처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일부 전문가는 범행에 미숙했던 범인이 1차 사건과 2차 사건을 통해 자신만의 패턴을 만든 것이라고 분석했으나 마지막 사건인 10차 사건에서도 기존의 시그니처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10차 사건 발생 직후 ‘10차 사건은 모방 범죄’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화성 2차 사건(1986년 10월 20일)의 현장 주변에서 빈 우유갑 2개가 발견되는가 하면, 농수로 안에 시신이 놓여 있는 등 단독 범행으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은 계속해서 나왔다.
1991년 5월 23일 일본 경찰수사과학연구소는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이 둘 이상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당시 경찰은 일본 연구소에 여러 차례 DNA 지문감식을 의뢰했다. 9차 사건과 10차 사건에서 용의자의 DNA를 채취했으나 국내 기술력으로는 DNA 감정이 어려웠다. 감식 결과 9차 사건과 10차 사건에서 검출된 것이 달랐다.
1991년 5월 24일자 한겨레는 “일본 연구소에 9차 사건에서 채취한 정액과 10차 사건에서 채취한 정액의 DNA 지문감식을 의뢰한 결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다”며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은 같은 범인에 의한 단독 범행이 아니고 최소한 2명 이상의 범인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이후 일본 연구소는 업무폭주를 이유로 화성사건의 DNA 감식의뢰를 거절했다.
한편 민갑룡 경찰청장은 9월 23일 오전 출입기자단과의 정례브리핑에서 ”공범과 여죄가 있을 수 있어 속단할 수 없다“며 공소시효와 상관없이 철저하게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