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가을하늘 아래, 포스트시즌 시작을 알리는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열렸다. 사진은 지난 10월 3일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열린 잠실야구장. 사진=연합뉴스
와일드카드(Wild Card)는 카드 게임에서 ‘만능’으로 쓰인다. 다른 모든 카드를 대체할 수 있는 올 라운드 플레이어다. 그러나 스포츠에서 사용할 때는 뜻이 좀 다르다. 아깝게 플레이오프 진출 자격을 얻지 못한 팀이나 선수에게 추가로 진출권을 주는 제도. 이른바 최후의 ‘보너스’다.
KBO리그에 ‘와일드카드’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사상 최초로 10개 구단 체제가 출범한 2015년이다. 이 제도 도입은 결과적으로 KBO리그 흥행을 폭발시키는 좋은 계기가 됐다. 자칫 싱거워질 수 있던 순위 경쟁에 불을 붙이는 자극제 역할을 했고, 5위뿐 아니라 3위와 4위 경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와일드카드 제도의 기원
와일드카드 제도는 1994년 메이저리그에서 처음 시작됐다. 그 해부터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가 동부·중부·서부 3개 지구로 나뉘면서 지구 우승팀이 홀수가 된 탓이다. 따라서 3지구 2위 팀 가운데 승률이 가장 높은 구단에 와일드카드를 주고 디비전 시리즈에 참가할 수 있게 했다. 와일드카드를 따낸 팀은 3지구 우승팀 가운데 승률이 가장 높은 팀과 5전 3선승제 디비전 시리즈를 치러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권을 다툰다.
도입 첫해에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파업으로 와일드카드 팀이 탄생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1995년 처음으로 와일드카드 팀이 나왔다. 내셔널리그의 콜로라도와 아메리칸리그의 뉴욕 양키스였다. 하지만 이후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뒤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하는 사례가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나왔다. 심지어 2002년에는 와일드카드 진출 팀인 샌프란스시코와 애너하임이 월드시리즈를 펼쳤을 정도다. 2011년에도 와일드카드로 진출한 세인트루이스가 우승컵을 들어올리자 결국 2012년부터 와일드카드 결정 방식이 손질됐다. 리그당 한 팀이 아니라 두 팀이 와일드카드를 얻고, ‘원 게임 플레이오프’를 통해 디비전 시리즈 진출 팀을 가리는 방법이다. 와일드카드 두 팀 중 성적이 더 좋은 팀이 홈구장에서 경기를 시작할 수 있게 했다.
이전까지 와일드카드 진출팀들은 지구 우승팀들과 사실상 동등한 조건에서 디비전 시리즈를 시작했다. 1위 팀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주어지는 KBO리그와 달랐다. 그러나 제도가 바뀐 이후 와일드카드 팀들에는 한 차례 단판 승부의 부담감이 추가됐다. 지구 우승에 대한 프리미엄을 확실히 늘렸다는 점에서 일리 있는 제도라는 호평이 잇따랐다. 어느 정도 승수를 확보한 뒤에는 굳이 우승을 노리지 않고 와일드카드 자리에 안주하려 했던 일부 팀들에게 경종도 울린 셈이다.
다만 이후에도 와일드카드 팀이 꾸준히 포스트시즌에서 승승장구한 것은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규정 변경 후인 2014년 샌프란시스코와 캔자스시티는 역대 두 번째 ‘와일드카드 월드시리즈 맞대결’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KBO리그 와일드카드 특징
KBO리그에는 드림리그와 매직리그로 나뉘어 운영되던 1999년과 2000년 처음으로 비슷한 개념이 도입됐다. 당시 각 리그 2위 팀까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한 리그 3위 팀이 다른 리그 2위 팀보다 승률이 높을 경우 두 팀이 짧은 준플레이오프를 치러 플레이오프 진출 팀을 가렸다. 상황에 따라 한 리그에서 3개 팀, 다른 리그에서 1개 팀이 각각 올라갈 수도 있는 방식이었다.
현재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도입된 것은 2015년이 처음이다. 이전까지 한국 프로야구에서 ‘포스트시즌 진출’은 ‘4강’의 동의어였다. 그러나 NC에 이어 KT가 1군에 합류하면서 구단이 10개로 늘어나자 “10개 팀이 네 자리를 놓고 싸우는 것은 너무 어렵다. 절반은 가을 야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KBO도 신중하게 검토한 끝에 와일드카드 도입을 의결했다.
처음 안건이 나왔을 때만 해도, 4위와 5위의 게임차가 1.5경기 이내일 때만 단판 승부로 준플레이오프 진출 팀을 가리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논의가 거듭되면서 방식이 바뀌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무조건 치르되, 4위 팀에 1승과 홈 어드밴티지를 주는 방식이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은 최대 2경기까지 치러진다. 대신 다른 시리즈와 달리 두 경기 모두 4위 팀 홈구장에서만 열린다. 무엇보다 4위가 1승을 먼저 안고 시작한다. 따라서 4위 팀은 무승부만 한 번 해도 1승 1무로 준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낸다. 반대로 5위는 무조건 2경기를 다 이겨야 플레이오프에 올라갈 수 있다. 1무든 1패든 먼저 2승을 하지 못하면 탈락이다. 상위 순위 팀에 1승의 어드밴티지를 주는 일본의 클라이막스 시리즈 방식과 메이저리그 와일드카드 결정전의 특징을 적절하게 섞었다.
이 때문에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는 연장 15회말이 열리지 않는다. 연장전이 12회까지로 제한된 정규시즌과 달리 포스트시즌은 연장 15회까지 맞붙어 승자를 가리는 게 규정이다. 하지만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연장 15회초까지 원정팀이 점수를 뽑지 못하면, 홈팀이 공격하는 15회말 결과와 관계 없이 원정팀의 탈락이 확정된다. 홈팀이든 원정팀이든 굳이 결과가 정해져 있는 공격과 수비를 한 이닝 더 소화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치열한 5위 전쟁 만들어낸 와일드카드
와일드카드 제도는 도입 첫 해인 2015년부터 확실한 존재감을 뽐냈다. 하필 그 해 KBO리그는 상위 4개 팀의 판도가 일찌감치 갈라졌다. 8월이 끝난 시점에 삼성, NC, 두산, 넥센이 4강권을 형성한 뒤 나머지 6개 팀과 격차를 벌려 나갔다. 4위 넥센과 5위 한화의 격차가 무려 6.5경기. 자칫 한 시즌 장기 레이스의 중·후반이 너무 싱겁고 김빠질 뻔했다.
그러나 가을 잔치 마지막 한 자리를 둘러싼 5위 경쟁이 전례 없이 치열했다. 5~8위 간 격차가 단 3경기에 불과했을 정도다. 게다가 이 와일드카드 경쟁에 포함된 팀들이 KIA, 롯데, 한화와 같은 인기 구단들이라 팬들의 관심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결국 연승과 연패 한 번에 날마다 희비가 엇갈리다 시즌 종료 직전에야 순위가 결정됐다. 승자는 김용희 감독이 이끌던 SK였다.
이후 4년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2017년에는 5위 전쟁이 시즌 막바지까지 이어진 데다 전국구 인기 톱3 구단으로 통하는 ‘엘롯기(LG·롯데·KIA)’가 모두 와일드카드 전쟁에 참전해 팬들의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하지만 이 시즌 역시 세 팀에 비해 상대적 비인기 구단으로 분류됐던 SK가 5위로 와일드카드 결정전 티켓을 따냈다. 외국인 감독 트레이 힐만의 부임 첫 시즌이었다.
지난해에도 5위 자리를 놓고 시즌 막바지까지 숨 막히는 싸움이 이어졌다. 직전 시즌 통합 우승팀 KIA가 5강 한 자리를 마지막으로 차지해 시즌 종료 직전까지 흥행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올해는 막내 구단들인 NC와 KT가 시즌 막바지까지 5위 경쟁을 이어갔다. 2017년까지 ‘가을잔치 터줏대감’이던 NC가 뒷심을 발휘해 KT를 눌렀다.
와일드카드 결정전 도입과 동시에 3위와 4위 경쟁도 예년보다 훨씬 치열해졌다. 이전까지 많은 감독들은 “3위와 4위는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는 1위나 플레이오프에 먼저 오르는 2위와 달리, 3위와 4위는 동일하게 준플레이오프부터 포스트시즌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생기면서 3위는 4위에 비해 확실한 이점을 얻었다. 4위가 준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아 보지도 못하고 탈락할 위험이 생긴 반면, 3위는 리그 종료 후 사흘 휴식을 취한 뒤 5위 팀과 전쟁을 치르고 온 4위 팀을 만나는 부수 효과까지 누리게 됐다. 또 4위 팀이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에이스 카드를 소진하고 올라오는 경우가 많아 준플레이오프 1차전 선발 매치업에서 상대적 우위도 점할 수 있게 됐다.
그간 네 번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승리한 팀 중 3팀이 준플레이오프를 넘어 플레이오프로 진출했다. LG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사진=연합뉴스
#와일드카드전 승리팀, 75%는 플레이오프 갔다
올해는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생긴 지 다섯 번째 시즌이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4위 팀이 승리해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그 가운데 네 차례는 모두 1차전에서 승부가 끝났다. 2016년만 유일하게 5위 팀 KIA가 와일드카드 결정 1차전에서 승리해 2차전을 한 번 더 치렀지만, 결국 당시 정규시즌 4위였던 LG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또 첫 해부터 지난해까지 네 차례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승리한 4위팀들 가운데 세 팀은 모두 준플레이오프에서 정규시즌 3위팀을 꺾고 플레이오프 무대까지 밟았다. 2015년 넥센만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을 만나 1승 3패로 패했을 뿐이다. 다만 아직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한 팀은 한 팀도 없다. 2016년 승자인 LG는 준플레이오프에서 넥센을 3승 1패로 물리친 뒤 플레이오프에서 NC를 만나 1승 3패로 패했다. 또 2017년 승자 NC는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를 3승 1패로 꺾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 1승 3패로 졌다. 3패 모두 두 자릿수 실점을 했을 정도로 무기력한 승부였다. 지난 시즌에는 넥센이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3승 1패로 꺾었고, 플레이오프에서 SK와 5차전 연장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2승 3패로 아쉽게 져 한국시리즈 문턱에서 물러났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명승부 제조기’ 역대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생긴 일 포스트시즌의 첫 관문인 와일드카드 결정전은 그 역사에 비해 명승부와 명장면을 많이 남겼다. 도입 첫 해인 2015년부터 그랬다. 동점 상황이 세 차례나 반복되는 접전이었다. 결국 넥센과 SK가 4-4로 팽팽하게 맞선 채 연장전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엎치락뒤치락 승부의 마지막에는 허무한 끝내기 실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장 11회말 2사 만루. SK 구원투수 박정배는 넥센 타자 윤석민을 유격수 플라이로 유도했다. 타구는 내야 안에서 높이 떠올랐고, 그대로 넥센의 득점 기회는 날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모두 아웃을 예상하던 그 순간 공이 그라운드로 떨어졌다. SK 투수, 2루수, 유격수가 모두 달려 들었지만 누구도 이 공을 잡지 못한 탓이다. 결국 SK 유격수 김성현의 끝내기 실책으로 기록됐고, SK는 힘겹게 올라온 가을 잔치를 1경기 만에 마감했다. 사상 첫 와일드카드 결정전의 허무한 마침표였다. 2016년은 더 치열했다. 1차전에서는 본의 아니게 두 팀 유격수가 수비로 승부의 향방을 결정했다. LG는 유격수 오지환이 4회초 결정적인 실책을 범해 KIA에 2점을 헌납했고, KIA는 유격수 김선빈의 두 차례 호수비로 실점 위기를 막았다가 8회 다시 김선빈의 낙구 실책으로 역전 위기에 몰리는 아찔한 상황을 겪었다. 결국 KIA 마무리 투수 임창용이 9회말 무사 1루를 투수 병살타로 막아내면서 팀 승리를 지켰다. 2차전은 국내 에이스들의 팽팽한 투수전과 야수들의 호수비 퍼레이드가 펼쳐진 ‘역대급’ 명승부였다. LG와 KIA팬들뿐 아니라 다른 팀 팬들에게도 박수 세례를 받았을 정도다. LG 선발 류제국이 8이닝 무실점, KIA 선발 양현종이 6이닝 무실점으로 각각 호투했다. 또 LG 오지환이 전날 실수를 만회하는 호수비를 펼치고, 반대로 김선빈은 또 한 번 실책으로 팀 동료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하지만 최고의 명장면은 8회말에 나왔다. 0-0으로 맞선 2사 2·3루서 LG 양석환은 우익수 쪽으로 향하는 안타성 타구를 날렸다. 경기 막바지라 2실점은 치명적. 사실상 승부를 가를 수 있는 타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때 당시 KIA 소속이던 노수광이 나타나 몸을 날리며 타구를 잡았다. 말 그대로 ‘슈퍼 캐치’. 지켜보던 모든 이를 감탄케 했다. KIA는 결국 9회말 1사 만루서 임창용이 김용의에게 끝내기 희생플라이를 맞아 0-1로 석패했다. 하지만 이때도 전진수비하던 KIA 중견수 김호령이 우중간을 가르는 김용의의 2루타성 타구를 끝까지 달려가 잡아내는 투지를 보여줬다. 타구 하나, 하나에 모두 집중하고 희비 또한 극명하게 엇갈리는 ‘가을 야구’의 진수를 보여준 한 판이었다. 그에 반해 2017년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선 SK가 가장 믿었던 에이스 메릴 켈리가 1회말부터 4점을 내주면서 2⅓이닝 8실점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NC 나성범과 박석민이 켈리를 상대로 첫 회부터 연속 타자 홈런을 때려내기도 했다. SK 선발 제프 맨쉽 역시 4이닝 3실점으로 좋지 않았지만, 결국 경기는 NC의 10-5 승리로 싱겁게 끝났다. 지난 시즌에는 넥센 이정후가 또 한 번의 ‘슈퍼 캐치’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KIA가 넥센을 5-5로 따라 붙은 7회초 무사 1루였다. KIA 중심타자 최형우가 풀스윙으로 타구를 외야 멀리까지 보냈다. 좌중간을 완벽하게 가를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좌익수 이정후가 그 타구를 노려보며 전력질주했다. 그리고 2루타가 될 듯했던 타구는 낙구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이정후의 글러브로 거짓말처럼 빨려 들어갔다. 좌익수 플라이. 동시에 최형우의 타구를 안타로 확신하고 이미 3루 근처까지 가 있었던 1루 주자 나지완까지 2루에서 아웃됐다. 순식간에 아웃카운트 두 개가 올라갔고, 가장 큰 위기를 벗어난 넥센은 여세를 몰아 10-6으로 이겼다. 5회말 한 이닝에만 실책 3개를 범해 에이스 양현종에게 4실점(무자책) 수모를 안긴 KIA는 상대의 호수비에 역공을 당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LG의 모범 외국인 투수 케이시 켈리가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팀을 준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리드오프로 기용된 이천웅이 3안타로 공격의 물꼬를 트고, 장발의 중심타자 이형종이 두 번의 적시타로 꼭 필요한 점수를 뽑았다. 대타로 기용된 LG의 ‘살아있는 전설’ 박용택은 펜스 바로 앞에서 잡히는 큼직한 외야 플라이로 추가점을 뽑았고, LG의 새 소방수 고우석은 9회초 위기를 무사히 탈출해 가을야구 신고식을 마쳤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