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 수원대 교수
그 촛불바다 위에 해인(海印)처럼 드러나는 것은 ‘조국 수호’ ‘검찰개혁’이었다.
거기 모인 시민들이 왜 모르겠는가. 이익을 내지는 못했으나 의도는 의심할 수 있는 펀드와, 내용과 사실이 다를 수도 있는 표창장, 그리고 금수저에게 수여된 장학금의 문제를.
어쩌면 그것은 강남좌파의 문제, 아니, ‘강남’의 문제일 수 있겠다. 누가 뭐래도 내 아이만은 금수저로 키우겠다는 열망이 모여 있는 강남에서 조국 장관의 식구들이 공기처럼 누린 것이 ‘좌파’로서의 지향성에 걸림돌이 되어 분명하게 부각된 것인지도.
그날 시민들은 결점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냐며 피로 묶인 가족을 비호하듯 맹목적으로 ‘조국 수호’를 외친 것이 아니었다.
인사 청문회 당일, 검찰은 딸의 동양대 표창장을 위조했다며 정경심 교수를 사문서 위조 혐의로 기소했다. 염라대왕도 그럴 것 같지 않은, 해도 해도 너무한 검찰이었다. 왜 검찰은 그토록 조국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일까. 혹 그가 하려고 하는 검찰개혁의 부담 때문은 아닐까하는 의심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대목이다.
그리고 우리는 중도를 지키지 않는 선택 수사가 얼마나 위험한지, 수사권과 기소권이 함께 있으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봐버린 것이었다. 균형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검찰의 민낯을 보고 다시 한 번 검찰개혁이 시대정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조국 장관이 임명된 후 우리 사회는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개천절 날 광화문에서 열린 맞불집회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엄청난 갈등과 진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태풍 같은 그 진통에 조국 일가는 아예 쓸려가고 있는 인상이다. 내 주변에서도 그래서 ‘조국은 안 된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분명히 그것도 여론이다. 그러나 혼돈이 없이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는다. 창조는 원래 혼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조국 수호가 조국의 수호인 것처럼 조국 수호를 외치는 상황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조국을 향한 무차별적인 공격의 이유를. 그것은 조국이 절대반지를 옮기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절대반지는 누가 옮기는가. 반지에 관심이 없는, 작고 천진한 호빗족만이 반지를 옮길 수 있다. 물론 그들도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절대반지를 옮기는 이의 숙명이다.
조국 장관이 사명감을 가지고 하고자 하는 검찰개혁은 김대중 대통령도, 노무현 대통령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는 박지원 의원의 조언은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위험한 사명인가를 말해준다. 낭만적 발상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리라.
이미 조국은 법무장관이 되는 과정에서 인생이 모두 털리고 편집되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어쩌면 정치 9단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일을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내듯 살고 있는 조국이 끝까지 호빗이기를 바란다. 그가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 바다의 힘으로 검찰개혁을 이루기를, 있어야 할 자리로 반지를 잘 옮기기를 기원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