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사내이사직에서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 및 수행원 오찬에 앞서 옥류관 테라스에서 대동강을 바라보고 있는 이재용 부회장.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사내이사 임기를 연장하려면, 등기임원인 만큼 임시 주총을 열어야 한다. 소집공고는 14일 전에 내야 하고, 이사들에게는 주총 7일 전 소집을 통보해야 한다. 이재용 부회장의 사내이사 임기만료는 10월 26일. 늦어도 지난 10월 4일까지는 이사회 소집이 이뤄졌어야 하지만, 8일 현재까지 삼성전자에선 이사회나 주총과 관련한 움직임이 없다. 재선임을 위한 임시 주총이 열리지 않으면 이 부회장은 자동으로 사내이사직을 내려놓게 된다.
이재용 부회장이 사내이사에서 물러날 것이란 전망은 지난 3월 열린 삼성전자 정기주주총회서부터 나왔다. 예상과 달리 정기주총에 이 부회장의 재선임 안건이 올라오지 않아서다. 당시엔 임기가 7개월가량 남았고, 국정농단 사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이 나오지 않았던 상황이었던 만큼 하반기 임시주총에서는 안건이 올라올 수 있을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8월 30일 대법원이 이 부회장의 횡령·뇌물죄 파기환송을 결정하면서 사실상 재선임은 이뤄지지 않는 쪽으로 기울었다.
앞서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돼 2017년 실형을 선고받고 지난해 2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대법원이 이를 뒤집는 취지로 파기환송을 하면서 이 부회장은 법정다툼을 이어나가야 한다. 파기환송심 첫 재판도 오는 10월 25일에 열린다. 이 과정에서 사내이사 재선임을 위한 임시 주총이 열리면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삼성전자 지분 9.97%를 가지고 있는 국민연금도 이 부회장 입장에선 부담이다.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 의결권 행사 지침)를 도입한 이후 투자 기업에 대한 경영 참여를 본격화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삼성전자 주총에선 ‘노조 와해’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던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의 사내이사 임기 연장에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동안 국민연금이 이 부회장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적지 않았다.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사기’ 논란에도 다시 불이 붙을 가능성이 높다.
재계 관계자는 “법적으로는 재선임을 해도 문제가 없고,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져도 결과는 다를 수 있다”면서도 “다만 부담을 안고 무리하게 임기를 연장하기보다는, 각종 논란을 해소한 이후 복귀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듯하다”라고 분석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사내이사에서 물러나도 삼성전자 이사회와 회사 경영 환경 등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 부회장은 2016년 10월 27일 서울 서초사옥에서 열린 임시주주총회에서 3년 임기 신규 사내이사로 선임됐는데, 2016년 말까지 열린 이사회에는 모두 참석했지만 2017년부터 최근까지는 단 한 차례도 참석하지 않았다. 사내이사에 오른 지 4개월 만에 국정농단 사건 1심 선고로 구속된 데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았지만 형이 확정되지 않은 만큼 복귀한 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의 임기 만료로 공석이 되는 사내이사직을 그대로 유지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삼성전자 이사회는 사내이사 이상훈 이사회 의장과 김기남 부회장, 김현석 사장, 고동진 사장, 4명과 사외이사 6명으로 구성된다. 이 부회장이 빠져도 현행법 기준은 충족한다. 상법에 따르면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회사는 이사회 과반을 사외이사(3인 이상)로 둬야 한다. 사실상 삼성전자 이사회는 ‘현상 유지’를 하는 셈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보이는 최근의 경영 행보도 그대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 부회장은 메모리·디스플레이 실적부진, 미-중 무역분쟁, 일본 수출규제 등이 이어지면서 ‘현장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다. 국내 삼성그룹 계열사 사업장을 찾는 것으로 시작해 최근엔 처음으로 건설계열사 삼성물산 사우디아라비아 현장에도 방문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경영 활동이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노출되면서 이 부회장의 ‘역할론’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의 임기 만료로 공석이 되는 사내이사직을 그대로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고성준 기자
그러나 이 같은 ‘현상 유지’는 또 다른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부회장이 사내이사에서 물러나면서 경영 활동을 확대하는 건 모순이라는 것이다. 사내이사는 경영의 주요 의사 결정하면서, 민형사상 책임까지 진다. 한국 특유의 ‘재벌’ 문화 속에서 그룹 총수일가의 사내이사직은 ‘책임경영’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실제 이 부회장이 2016년 사내이사에 오른 이유도 책임경영 차원이었다. 부회장 직책을 수행하고 그룹 전반을 이끌면서도 법적 책임이 있는 사내이사는 맡지 않는다는 지적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 임원이 된 지(2001년) 15년 만에 처음으로 사내이사직에 올랐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삼성은 2017년 12월 미래전략실(미전실)을 해체하고 대신 계열사 자율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이 작업의 핵심은 이사회 역할 강화였다. 과거 미전실을 중심으로 그룹 총수에게 집중되는 권한을 완벽히 분산시키겠다는 목적이었다. 다음해인 2018년 3월에는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분리했다. 역시 이사회 책임과 독립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였다. 결국 이 부회장이 사내이사에서 물러나면서도 경영행보를 지속하는 건 최근 2~3년 동안 삼성이 추진한 책임경영 작업과 정반대의 모습이 되는 셈이다.
또 삼성이 공시한 지난해 이사회 안건과 결과를 보면, 회사가 ‘이사회 강화’를 선언한 지난 2018년 대부분의 안건은 재무제표 승인이나 주총 소집, 분기반기 보고서 승인이었다. 2018년 4월 삼성중공업 유상증자 승인과 과거보다 대폭 늘린 사회공헌 활동을 제외하면 경영 활동에 핵심 역할을 하기보다는 이사회의 일반적인 역할을 하는 데 그쳤다. 이사회의 역할이 제한적이고, 총수가 경영 행보를 확대하는 모습은 과거 책임경영 선언 이전의 삼성의 모습과 겹쳐질 수밖에 없다.
현재 이 부회장은 미전실 해체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경영진과 소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정적 여론과 재판 등으로 인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공식적으로 경영진과 소통할 수 있는 자리가 이사회인 만큼 그동안 추진한 ‘이사회 강화’ 작업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사회를 실질적인 의사결정기구로 정착하는데 주력하고 있다”며 “경영진은 사업에 전념할 수 있었고, 이사회는 경영진 감독을 강화했다. 이사회가 직접 사업을 개척하는 게 아닌 만큼 역할이 없었던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투자와 M&A(인수·합병) 등의 이슈가 생기면 이사회가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