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씨는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까지 화성의 한 농기구 수리 공업사에서 일하면서 먹고 자고 생활했다. 당시 공업사 주인으로 윤 씨와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A 씨는 10월 7일 전화 인터뷰에서 윤 씨가 자신에게 “경찰이 1년만 살고 나오면 된다고 했다. 사나이가 돼 가지고 1년 끝까지 살고 나오지 뭐”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당시 경찰의 회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증언이다.
이춘재의 중학교 졸업사진. 사진=제보자 제공
A 씨 가족은 1981년 농기구 공업사를 인수했다. 당시 윤 씨는 그 공업사에서 붙박이로 일하면서 생활하는 식구였다. 화성 주민들에 따르면 윤 씨의 작은아버지가 그를 공업사에 맡기고 갔다고 한다. 공업사가 A 씨에게 팔리면서 ‘공업사에 딸린 식구’였던 윤 씨는 자연스레 A 씨와 가족처럼 지내게 됐다.
윤 씨에겐 가족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을에선 윤 씨가 고아라고 알려졌을 만큼 윤 씨 가족은 그를 돌보지 않았다.
A 씨는 “윤 씨 작은아버지가 안성에서 포도농장을 했었다. 누나 한 명과 아버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있으나마나였다. 다달이 얘(윤 씨) 월급날만 되면 찾아와서 월급을 가로채 가곤 했다”고 전했다.
윤 씨는 낮엔 일하고 밤엔 A 씨의 가족이 ‘안집’으로 들어가면 공업사에 남아 잠을 잤다. 윤 씨는 성실하고 기술도 좋았다. 윤 씨가 범인으로 교도소에 들어가자 A 씨는 줄곧 면회를 다녔다. 윤 씨가 A 씨네 가족에게 면회를 와달라는 편지도 보내기도 했다.
A 씨는 “얘(윤 씨)가 처음엔 자기가 했다고 하니까 얘 작은아버지가 ‘넌 이제 내 조카 아니다’라고 하고 떠났지만 우리는 얘(윤 씨)가 범인이라고 생각 안 했다. 기술도 좋고 오래 우리랑 같이 생활했으니까 교도소로 면회를 다니고 용돈도 넣어줬다. 그러나 경상도 쪽에 있는 교도소로 이감된 뒤론 못 찾아갔다”고 설명했다.
이어 A 씨는 “경찰이 얘를 회유한 거 아니냐는 생각을 지금 와서 한다. 당시에 구치소에 데모하다가 잡혀 들어간 한신대 학생들이 많았는데, 얘를 만나서 얘기해보곤 구치소에서 나와서 이 형(윤 씨)은 범인이 아니라고 우리 집에 전화가 많이 왔었다”고 전했다.
윤 씨의 작은어머니는 10월 8일 MBC 인터뷰에서 소아마비가 있던 윤 씨를 경찰이 고문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윤 씨의 작은어머니는 “평상시에도 막 비틀비틀 걸음도 잘 못 걷고 그러는데 얼마나 고문이 심했는지 어쨌는지 단번에 그냥 훌쩍 넘어가더래요”라고 말했다.
청주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윤 씨는 2009년 가석방돼 청주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윤 씨는 여러 언론과 접촉에서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윤 씨는 “날 찾지 마라. 혼자 내버려 두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며 언론 인터뷰 거부 의사를 강하게 밝혔다. 윤 씨는 현재 경찰과 언론의 불신이 강하다고 전해졌다.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5일 화성군 태압읍 진안리(현재 화성시 진안동) 자택에서 자고 있던 중학생 박 아무개 씨(13)가 강간살해된 사건이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