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가에서 ‘책방’(책+방송)이 새로운 키워드로 떠올랐다. 관찰을 기반으로 한 육아 예능, 먹방 등이 인기를 얻은 데 이어 제작진들이 이제는 책으로 눈을 돌렸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는 시대가 열린 셈이다.
사진=tvN ‘요즘책방: 책읽어드립니다’ 홈페이지
책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TV에 이어 스마트폰에 중독된 세대는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다. 활자화된 글을 꼼꼼히 읽으며 그 내용을 음미하는 능동적인 글 읽기보다는, 스마트폰 맞춤형이라 할 수 있는 영상을 탐독한다. 물론 그 안에도 글은 담겨 있지만 주로 영상과 말, 자막 등을 통해 내용을 전할 뿐이다. 이런 콘텐츠를 접하는 대중 역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즘책방: 책읽어드립니다’의 제작발표회에서 출연진들이 들고 나온 키워드는 ‘어려운 책은 쉽게’ ‘두꺼운 책은 가볍게’ ‘지루한 책은 재미있게’였다. 책은 어렵고, 두껍고, 지루하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쉽게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의미다.
‘요즘책방: 책읽어드립니다’는 tvN 강연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을 만든 정민식 PD의 차기작이다. ‘어쩌다 어른’을 통해 인문학에 눈을 뜬 정 PD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덤에 오른 설민석 한국사 강사와 다시 손잡았다. 정 PD는 “‘어쩌다 어른’을 4년 동안 진행하는 과정에서 책의 중요성을 느끼게 됐고, ‘설민석 선생님만의 재미있는 전달력으로 시청자들에게 알려드리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책을 쓴 저자의 의도를 출연자들의 각각의 생각으로 표현하면서 독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한도전’으로 유명한 김태호PD의 복귀작 가운데 하나인 MBC ‘같이 펀딩’ 역시 책을 들고 나왔다. 대중이 참여하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의미 있는 일을 실행해가는 과정을 다룬 이 프로그램에서 출연진인 배우 유인나는 오디오북 제작 펀딩에 도전했다. 이 과정에서 함께 출연한 후배 배우 강하늘과 함께 시청자와 스타들이 추천한 ‘내 인생의 책’을 공개했다.
9일 첫 방송된 종합편성채널 JTBC의 ‘멜로디책방’은 ‘영화나 드라마에는 있는데 책에는 왜 어울리는 OST는 없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인쇄 매체인 책, 고유의 영역을 넘어 ‘e-Book’과 ‘오디오북’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는 북 트렌드를 한 단계 높인다는 취지다. 가수 선우정아, 수란을 비롯해 아이돌 그룹 출신 이특, 박경 등이 참여해 음악적 측면을 강화한 책방이라는 측면에서 차별화된다.
책방에는 라디오도 뛰어들었다. MBC 표준FM은 가을 개편을 맞아 10월 5일부터 책 낭독 프로그램 ‘책을 듣다’를 선보였다. 유명 가수와 배우들이 낭독자로 참여해 30분 동안 책 한 권을 소개하는 방식이다. 1년여 동안 책 100권 이상 알리는 것이 목표고, 단순히 책만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의 의미를 짚고 올바른 책읽기 등을 전파한다. 이외에도 KBS 1라디오는 ‘백은하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을, KBS 3라디오는 ‘명사들의 책읽기’를 통해 책을 소개한다.
한 방송 관계자는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수없이 반복돼 온 명제다.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과정에서 책이 전면에 대두된 것”이라며 “하나의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으면 유사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기듯 책방 역시 여기저기서 제작되며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고 분석했다.
사진=JTBC ‘멜로디책방’ 홈페이지
엄밀히 말해, 책방은 새로운 기획이 아니다. 대중이 기억할 만한 책방의 역사는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익 예능으로 손꼽히던 MBC ‘느낌표’의 코너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가 방송됐다.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당시 타 프로그램을 압도할 만큼의 성과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에도 몇 차례 책을 앞세운 예능은 있었다. 잠정 은퇴를 선언했던 방송인 강호동의 복귀작이었던 KBS 2TV ‘달빛프린스’ 외에도 tvN ‘비밀독서단’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두 프로그램은 각각 2개월,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의미 있는 시도였다는 것에는 모두가 공감하지만 예능적인 재미를 충분히 주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게다가 책방을 둘러싼 업계의 반응도 갈린다. 책 자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진다는 것은 반갑다. 하지만 매일 수십 권의 새 책이 쏟아지는 상황 속에서, 방송에서 다뤄지는 책은 극히 일부다. 게다가 신간보다는 고전이나 이미 업계 내에서는 유명했으나 대중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책 위주로 소개할 수밖에 없다. 책방을 기반으로 몇 년 전 발표한 책들이 뒤늦게 인기를 얻으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면 신간들의 설 자리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한 출판사 대표는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드라마가 제작되며 ‘PPL(제품간접광고)을 해주겠다’며 책을 몇 권 드라마 속에 소개하는 대가로 제작지원금을 요구한 사례가 있었다. 그만큼 방송을 통해 책이 소개되면 홍보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새로운 책이 끊임없이 나오며 선순환이 이뤄져야 하는 상황 속에서 책방은 과거 이미 발간된 책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자는 캠페인은 지속적으로 펼쳐야 하고, 이번 책방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띨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어쩌다 어른’과 JTBC ‘차이나는 클라스’와 같은 강연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을 정도로 인문학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높아진 만큼 책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졌다는 것이다. 또한 배우 박정민을 비롯해 아나운서 오상진 부부 등이 서점을 운영하는 것이 알려지며 화제를 모았듯, 책이 주류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정민식 PD는 “선정 과정에서 공정성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자문위원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방송이 나가기 전에 출판사, 유통업체와 공유하지 않는다”며 “전문 자문위원들이 추천한 책 중 ‘이 시대에 가장 실용적인 느낌이 무엇인가’라는 가치 기준으로 고른다”고 덧붙였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