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홈런왕 박병호는 지난 6일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LG 마무리투수 고우석을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기록했다. 사진=연합뉴스
특히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터져 나온 끝내기 홈런 한 방은 그 꽃이 만개하는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한 장면이니만큼 쉽게 보기도 어렵다. 지난해까지 총 37번의 포스트시즌을 통틀어 단 9번만 끝내기 홈런이 나왔다. 준플레이오프에서 2회, 플레이오프에서 4회, 한국시리즈에서 3회였다. 하지만 올해는 바로 이 끝내기 홈런이 준플레이오프의 포문을 화려하게 열었다. 올 시즌 홈런왕인 키움 박병호가 KBO 포스트시즌 통산 10번째 끝내기 홈런의 주인공이 됐다.
#홈런왕 박병호의 통산 10호 끝내기 홈런
박병호는 지난 10월 6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LG와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자신의 주특기인 홈런으로 팀 승리를 만들어냈다.키움 선발 제이크 브리검과 LG 선발 타일러 윌슨의 투수전 속에 9회초까지 양 팀이 단 한 점도 뽑지 못한 상황이었다. 키움은 0-0으로 팽팽히 맞선 채 9회말 마지막 정규이닝 공격을 시작했고, LG는 연장 승부를 예감하고 동점 상황에서 마무리 투수 고우석을 투입했다.
고우석은 올해 구원 2위에 오른 특급 소방수다. 시속 150km를 웃도는 강속구의 위력을 뽐내면서 올해 LG 마무리 투수로 확실히 자리를 굳혔다. 그런 고우석을 상대로 키움이 점수를 뽑아낼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키움에는 ‘9회의 남자’ 박병호가 있었다. 2013년 두산과 준플레이오프 5차전, 지난해 SK와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9회 2사 후 극적인 동점 홈런을 터트려 환희를 안겼던 주인공이다. 이미 포스트시즌에서 여러 차례 인상적인 홈런을 친 박병호의 기세가 훨씬 강했다.
선두타자로 나선 박병호는 고우석이 마운드에 올라 던진 초구가 한가운데 높게 몰리자 기다렸다는 듯 힘차게 받아 쳤다. 시속 154km에 달하는 강속구였지만, 벼락 같은 박병호의 스윙을 당해내지 못했다. 타구가 한가운데 펜스를 향해 하염없이 뻗어나가자 키움 더그아웃과 관중석은 삽시간에 뒤집어졌다. 평소 홈런을 치고도 좀처럼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박병호는 공이 담장을 넘어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홈으로 들어와 동료들과 얼싸안고 환호했다. 이날 경기의 유일한 타점이자 득점이 그렇게 극적으로 나왔다.
#태평양 김동기와 삼성 이만수
앞서 가을야구에서 나온 끝내기 홈런들 가운데 최초 한 방은 1989년 10월 8일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태평양 김동기가 터트렸다.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뉘어 운영되던 KBO리그가 단일시즌제로 바뀌면서 역대 최초의 준플레이오프가 개최된 해였다.
인천 연고팀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태평양이 역사적인 첫 가을잔치를 시작하던 날. 첫 경기부터 연장 13회까지 0-0 혈투가 펼쳐졌다. 김동기는 그 0의 행진을 깬 영웅이었다. 양 팀의 무득점이 이어지던 연장 14회말 2사 2·3루서 삼성 투수 김성길을 상대로 배트를 휘둘러 인천 도원구장 좌중간 펜스를 넘겼다. 끝내기 3점 홈런. 인천팬들을 열광시킨 가을야구의 첫 승리가 그렇게 극적으로 나왔다. 김동기는 타자가 아닌 포수로서도 태평양 선발 박정현의 14이닝 무실점 완봉 투구를 뒷받침했다. 그 해 19승으로 신인왕에 올랐던 박정현은 그 한 경기에서만 공 173개를 던졌다.
그 다음 홈런은 이듬해 터졌다. 삼성 이만수가 1990년 10월 7일 빙그레와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만들어냈다. 삼성은 9회말이 시작되기 전까지 3-4로 뒤졌지만, 선두타자 김용철이 빙그레 한희민을 상대로 동점 솔로포를 쏘아 올리면서 기회를 잡았다. 동점 상황에서 1사 후 타석에 들어선 이만수는 볼카운트 투스트라이크에서 삼진을 노리고 들어온 한희민의 3구째를 통타했다. 좌중간 담장을 넘어가는 끝내기 솔로 홈런. 이 홈런으로 5-4 역전승을 일군 삼성은 여세를 몰아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LG 김선진과 쌍방울 박철우
LG 김선진은 한국시리즈에서 친 끝내기 홈런 한 방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 1994년 10월 1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LG와 태평양의 한국시리즈 1차전. 6회 대주자로 출장한 김선진은 1-1로 팽팽히 맞선 연장 11회 1사 후 타석에 섰다. 그때까지 완투하던 태평양 김홍집은 무명 타자 김선진에게 그 경기의 141번째 공을 던졌다. 김선진은 초구를 받아쳐 천금 같은 끝내기 홈런으로 연결했다.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한국시리즈 역대 최초 끝내기 홈런이었다. 3시간 43분에 걸친 혈투를 펼쳤던 LG는천금 같은 홈런으로 마침표를 찍어 2-1로 승리했고, 그 승리를 신호탄으로 4승 무패 우승 신화를 썼다. LG의 두 번째 우승이자 현재까지는 마지막 우승으로 남아 있다.
사실 김선진은 한국시리즈 시작 전까지만 해도 시즌 직후 방출될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 LG 입단 5년째를 맞았지만 허리 부상으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해서다. 하지만 이 홈런 하나 덕에 선수생활을 6년 더 연장했다. 그가 은퇴할 때까지 포스트시즌 30경기 58타석에서 때려낸 단 하나의 홈런이 바로 그날의 끝내기포였다.
또 2년 뒤인 1996년 10월 7일 전주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1차전에선 쌍방울 박철우가 대단한 장면을 만들었다. 9회초까지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상황에서 조원우의 대타로 투입된 박철우는 현대 특급 마무리 투수 정명원의 2구째 직구를 공략해 한가운데 담장을 넘어가는 끝내기 홈런을 작렬했다. 역대 포스트시즌에서 유일한 대타 끝내기 홈런이자 쌍방울의 창단 첫 포스트시즌 승리를 만들어내는 아치였다.
#롯데 호세와 삼성 마해영
롯데 펠릭스 호세는 역대 가장 인상적인 외국인 타자로 꼽힌다. 다혈질 성격 탓에 이런저런 사건과 사고도 많이 일으켰지만, 타격 능력이 출중해 팬들의 사랑과 손가락질을 동시에 받았다. 외국인 타자와 관련한 여러 기록도 남기고 떠났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역대 유일한 외국인 타자 포스트시즌 끝내기 홈런 기록이다. 유일한 ‘역전’ 끝내기 홈런이기도 하다.
1999년 10월 17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플레이오프 5차전. 롯데는 시리즈 전적 1승 3패(양대 리그 시절이라 플레이오프를 7전 4선승제로 진행)로 탈락 위기에 몰려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3-5로 뒤진 채 9회말을 시작했다. 마운드에 있던 투수는 삼성 소방수 임창용. 롯데에는 그 해의 마지막 경기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때 기적이 벌어졌다. 선두타자 김대익의 2루타와 박정태의 볼넷으로 만든 1사 1·2루서 호세가 타석에 섰다. 호세는 임창용의 5구째를 힘껏 걷어 올려 좌중간 담장을 넘겼다. 승부를 단숨에 6-5로 뒤집는 역전 끝내기 3점포. 부산을 들끓게 한 한 방이었다. 이 홈런으로 2승 3패를 만든 롯데는 결국 내리 2승을 더 거둬 한국시리즈 티켓까지 따냈다. 롯데 구단 역사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홈런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2002년 11월 10일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는 삼성이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으로 창단 21년 만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당시 삼성은 한국시리즈 상대인 LG에 3승 2패로 앞선 상태였지만 6차전에서 6-9로 뒤진 채 9회를 맞아 패색이 짙었다. 이미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해 야구장을 떠난 관중도 많았다. 그런데 여기서 믿을 수 없는 이승엽의 동점 3점 홈런이 터졌다. 뒤이어 타석에 선 4번 타자 마해영은 LG 투수 최원호를 상대로 드라마 같은 우월 끝내기 홈런을 작렬했다. 결국 삼성의 10-9 승리. 삼성의 오랜 한이 홈런으로 풀렸다.
나지완은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 끝내기 홈런으로 한국시리즈 MVP까지 거머쥐웠다. 사진=연합뉴스
#나지완의 ‘한국시리즈 7차전’ 끝내기포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고의 홈런을 꼽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우승을 결정짓는 끝내기 홈런을 ‘마지막 승부’인 7차전에서 때려낸 선수는 역대 단 한 명뿐. KIA 나지완이다. 2009년 KIA와 SK는 3승 3패로 팽팽하게 맞선 채 운명의 7차전을 맞았다. 초반 분위기는 한국시리즈 3연패에 도전한 SK 쪽에 유리하게 흘렀다. 6회초까지 5-1로 앞서갔다. 그러나 KIA 타선은 늦게 발동이 걸렸다. 나지완이 6회말 2점 홈런으로 추격 시동을 걸었다. 7회말 안치홍의 솔로홈런과 김원섭의 적시타로 2점을 만회해 5-5 동점을 이뤘다.
마침내 찾아온 운명의 9회말. 투수를 모두 소진한 SK는 팔꿈치가 아파 쉬고 있던 채병용을 마운드에 올렸다. 반면 타석에 선 나지완은 앞선 타석에서 홈런을 터트린 터라 자신감이 충만했다. 볼카운트 2B-2S서 채병용이 던진 5구째 시속 143km 직구가 약간 높게 들어갔다. 완벽한 먹잇감을 찾은 나지완이 무섭게 배트를 돌렸다.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모두 홈런임을 직감했다. 역사적인 타구 하나가 잠실구장 하늘을 갈랐다. 나지완은 이미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잠실구장 베이스를 돌았다. KIA 선수들은 얼싸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KIA는 그렇게 ‘해태’에서 ‘KIA’가 된 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SK박정권과 한동민의 플레이오프 드라마
나지완의 홈런 이후 여덟 번의 포스트시즌에서 끝내기 홈런은 나오지 않았다.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포스트시즌 끝내기 홈런의 맥이 끊겼던 시기다. 하지만 2018년 ‘홈런군단’의 위용을 뽐낸 SK가 9년 만에 마침내 그 맥을 다시 이었다. 그것도 플레이오프 한 시리즈에서만 두 차례나 끝내기 홈런을 터트려 3승 가운데 2승을 만들어냈다. 넥센(현 키움)과 ‘역대급 명승부’ 덕이다.
먼저 10월 27일 열린 플레이오프 1차전. SK는 최정의 솔로포와 김강민의 2점포, 김성현의 3점포가 연이어 터져 5회까지 8-3으로 앞섰다. 하지만 넥센도 홈런쇼로 맞불을 놨다. 송성문의 연타석 2점 홈런과 외국인 타자 제리 샌즈의 3점 홈런이 잇달아 나와 8-8 동점이 됐다. 도리어 흐름은 넥센 쪽으로 넘어갔고, SK로서는 이 경기에서 패하면 더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때 숨죽이고 있던 ‘미스터 옥토버’가 나타났다. 베테랑 타자 박정권이다. 시즌 내내 2군에 머문 시간이 더 많았고, 이날도 대타로 경기 후반에 투입됐던 그는 9회말 1사 1루서 넥센 소방수 김상수를 상대로 홈 구장 한가운데 담장을 넘기는 아치를 그렸다. 2000년대 후반 SK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조의 후예’가 그 품격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뿐만 아니다. 두 팀이 시리즈 전적 2승 2패로 다시 만난 11월 2일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는 팀 후배 한동민이 거짓말 같은 홈런 한 방을 쏘아 올렸다. 경기 자체도 드라마 같았다. SK는 9회초까지 9-4로 앞섰지만, 9회말 연속 안타를 맞고 3점을 뺏긴 뒤 박병호에게 동점 2점 홈런까지 얻어 맞아 9-9로 연장전에 돌입했다. 심지어 연장 10회초에는 다시 한 점을 뺏겨 9-10 리드를 내줬다. 기록적인 역전패가 만들어질 분위기였다.
그러나 연장 10회말 베테랑 김강민이 동점 솔로포를 터트려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뒤이어 타석에 선 한동민은 넥센 투수 신재영과 9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백투백으로 끝내기 솔로 홈런을 작렬했다.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끈 최고의 한 방이었다. SK는 한국시리즈에서도 여세를 몰아 두산을 꺾고 역전 우승을 차지했고, 한동민은 시리즈 MVP가 됐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