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 사진=박은숙 기자
평상시 국회와 관공서 등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대관 직원들은 국정감사 시즌 단 하루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그룹 회장이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기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국감 불출석 처벌이 엄격해지면서 대관 직원들은 사전에 증인 채택을 막으려는 물밑 노력을 기울인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그 유형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먼저 학연과 지연을 강조하는 인맥형이 있다. 인맥을 최대한 동원해 친근감을 형성하려는 스타일이다. 그다음은 읍소형이다. 최대한 공손한 언행을 유지하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유형이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을 것 같지 않으면 곧바로 다른 의원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실속형’ 대관 직원들도 있다.”
2019년 국정감사에서도 어김없이 여러 회장의 이름이 증인 명단에 오르내리며 수많은 뒷말을 낳았다. GS는 4세 허세홍 GS칼텍스 대표이사가 국정감사 증인 명단에서 빠진 뒤 국외에서 골프를 즐기는 장면이 포착돼 논란의 중심에 섰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는 여수 산업단지 배기가스 배출량 조작 사건과 관련해 허세홍 대표를 국감 증인으로 채택했다. 허 대표를 증인으로 신청한 건 이용주 무소속 의원이었다. 그런데 국감 당일인 10월 2일 오전 이 의원은 돌연 허 대표 대신 실무자급으로 증인 변경을 요청했다. 여야 합의를 거쳐 국감 증인은 김기태 GS칼텍스 지속경영실장으로 변경됐다.
허 대표는 해외 출장을 이유로 증인 명단에서 빠졌다. 하지만 10월 1일 허 대표가 싱가포르 센토사 섬의 한 고급 골프장에서 홀로 골프를 즐기는 장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비판 여론이 거세졌다. GS칼텍스 측은 “허 대표는 원유도입 안정성 확보를 위한 주주사 해외 미팅 일정을 소화했다”고 해명했다.
국정감사에서 대기하고 있는 피감기관 소속 직원들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박은숙 기자
10월 4일 국회 정무위원회는 금융위원회 국감에서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상품(DLF) 사태’를 집중 추궁했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증인으로 손태승 우리은행장과 지성규 KEB하나은행장을 증인으로 채택하려 했지만 불발됐다. 해외 출장 일정 때문이었다. 손태승 행장과 지성규 행장은 각각 중동과 베트남에서 열리는 기업설명회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훈 자유한국당 의원은 “DLF 사태로 가장 큰 피해가 발생한 우리은행, 하나은행의 행장들이 해외 출장 중”이라면서 “이런 도피성 해외 출장 자체가 그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야는 두 은행장을 다시 증인으로 채택하는 방안을 협의할 예정이다.
이번 국감에선 회장 증인 채택 과정에서 국회의원 갑질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이명수 자유한국당 의원은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서 신동빈 롯데 회장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롯데그룹 계열사 롯데푸드와 협력업체 사이에 불거진 문제를 따지겠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 의원이 롯데와 접촉, 협력업체와의 합의를 요구하면서 “합의를 하지 않으면 신동빈 회장을 국감으로 부르겠다”고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10월 3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 의원은 롯데에 합의금 3억 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 측은 “배임이 될 수 있다”며 합의에 응하지 않았고, 이 의원은 신 회장을 국감 증인으로 신청했다. 이를 두고 국회의원 직권 남용 논란에 불이 붙었다. 결국 10월 4일 보건복지위는 “이 의원이 신 회장 증인 채택을 취소했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지역구 민원인이 롯데로부터 갑질을 당했다고 주장하니 원만하게 합의를 하라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구로 뉴스테이 사업 대기업 갑질 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대산업개발 역시 총수의 국감 출석을 막으려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함진규 자유한국당 의원은 이 논란과 관련해 정몽규 HDC현대산업개발 회장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하지만 여야 합의가 지지부진한 것으로 알려져 채택 불발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관련기사 계약 전 삽부터, 그게 가능해? 구로 뉴스테이 사업 새 의혹 추적).
뉴스테이 사업 관계자는 “현대산업개발 대관 직원들이 국회로 출동해 정 회장의 국감 증인 신청을 막으려 무던히 애썼다”고 밝혔다. 여러 의원실을 직접 찾았던 것으로 알려진 현대산업개발 임원은 10월 11일 통화에서 “그건(회장 국감 증인 신청을 막으려 의원실을 방문한 것) 아니다. 이런 저런 협의할 것이 있어서 갔다”고 부인했다.
한 기업 대관 직원은 “이번 국정감사에선 유력 기업 총수가 증인으로 출석한 경우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면서 “기업 총수들의 국감 출석 채택을 둘러싸고 불거졌던 석연찮은 부분들이 대관 직원들의 업무 흔적이 아닐까”라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