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사내 등기이사를 맡은 지 3년 만에 이사직을 내려놓을 것으로 보이면서, 그 이유를 두고 재계 안팎에서 다양한 해석이 쏟아진다. 사진=연합뉴스
복수의 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의 사내 등기이사직 임기가 만료되는 10월 26일까지 이사회나 임시 주주총회를 열지 않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내이사의 임기를 연장하기 위해서는 임기 내 주총을 열어 재선임을 의결해야 한다. 주총 개최를 위해서는 주총 14일 전 소집 공고, 주총 7일 전 이사들에게 소집 통보를 해야 하지만 전혀 진행된 게 없다. 3년 임기의 사내이사직을 연임 없이 그만둔다는 의미다. 이 부회장은 앞서 지난 2016년 삼성전자가 ‘갤럭시노트7 폭발 사고’로 위기에 놓이자 책임 경영을 이유로 등기이사를 맡았다.
이 부회장의 등기이사 연임 포기는 사회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삼성그룹 총수로서는 처음으로 법정구속된 국정농단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지난 8월 대법원이 경영권 승계를 뇌물 대가로 인정해 파기환송하면서 실형 가능성까지 대두되고 있다. 오는 25일 파기환송심 첫 공판도 앞둔 상황이기에, 이사직을 유지하면 언론과 학계·시민단체 지적을 받는 등 사회적 논란이 커지고 재판부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부담이 됐을 것이란 의견이다. 아울러 사내이사직을 내려놓더라도 삼성전자 부회장 직책을 유지하면서 총수로서의 역할을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는 “경영권 승계를 위한 뇌물공여죄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등기이사를 연임하면 얼마나 많은 사회적 반감을 사겠느냐”며 “재판을 앞두고 나쁘게 주목받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도 “이사직을 유지하지 않아도 경영진 인사권이나 주요 의사결정에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다”며 “재판에서 실형이 선고되면 이사 지위 유지에 결격 사유로 작용하는 등 부담이 커지기에 이사직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것”이라고 봤다.
일각에서는 해외시장에서의 신뢰도 하락 등 리스크를 해소하기 위해서란 의견도 나온다. 등기이사는 이사회 구성원으로서 기업 경영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에 대한 법적 지위와 책임을 갖는다.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에서는 실질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하는 기업 총수에게 법적 책임을 지우지 등기이사직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한 기업이 등기이사가 법적인 징계를 받았을 때 큰 불이익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파기환송심을 앞두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라는 의견이다. 재계 한 고위 임원은 “우리나라에서는 등기이사냐 아니냐가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얘기가 다르다”며 “등기이사직을 유지한 채 재판부의 징계를 받을 경우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도가 추락하고 실질적인 사업권 획득이나 계약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만큼 미리 발을 뺀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이 부회장이 현장 경영 행보를 늘려가는 것도 긍정적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서란 해석이다. 이 부회장은 9월 대법원 판결 이후 첫 출장으로 삼성물산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을 찾은데 이어, 일본과 인도를 연이어 방문하며 보폭을 넓히고 있다. 실형 위기가 어느 때보다 커진 가운데, 보다 적극적인 현장 경영으로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해 재판부가 선처해줄 것을 기대하는 게 아니냐는 것. 앞의 임원은 “열심히 뛰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 재판에서 가점을 얻으려는 것”이라며 “삼성에서 이재용의 역할이 이렇게 중요함에도 실형을 선고할 것인지 재판부를 압박하는 한편 등기이사직을 내려놓음으로써 글로벌 시장에서의 리스크를 줄이는 등 앞으로 전개될 모든 상황에 대비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등기이사를 연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공식 입장을 밝히기는 어렵다”면서도 “이사직을 내려놓는다고 해도 경영활동은 이어가는 등 이 부회장의 역할이 달라지는 건 없다”고 설명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근 인도를 방문하는 등 현장 경영 행보를 늘려가는 이유에 대해, 파기환송심을 앞두고 실형 위기가 어느 때보다 커지자, 글로벌 기업 총수로서의 자기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란 의견이 나온다. 사진=연합뉴스
일각에서는 사내이사 포기는 이 부회장의 경영권이나 지배력과 큰 관련이 없지만, 아직 경영권 승계 작업이 마무리되지 못한 만큼, 향후 리스크가 생길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는다. 삼성그룹 지배구조는 오너 일가→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진다. 오너 일가가 지분 33%가량 보유한 지주사격인 삼성물산은 삼성생명 지분 19.3%를, 삼성전자 지분 5%를 보유 중이다. 또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8.5%를 갖고 있고, 삼성화재도 삼성전자 지분 1.5%를 보유하고 있다.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을 통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간접 지배하는 형태다. 이처럼 삼성물산의 삼성전자에 대한 직접 보유 지분이 5%에 불과하고 이 부회장의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보유 지분도 각각 0.06% 0.7%에 그치는 만큼, 금융계열사의 삼성전자 지분을 삼성물산으로 넘겨 삼성전자 지배력을 공고화하는 것이 승계의 마지막 퍼즐이다. 그러나 국정농단 재판과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 의혹 수사가 지속되면서 모든 작업이 중단됐다.
이 와중에 금산분리를 강화하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해당 법안은 보험사의 계열사 주식보유한도에 대한 법률로, 보험사의 계열사 주식보유한도 계산 시 기준을 현행 취득원가에서 시가로 변경하고, 한도 초과분에 대해서는 의결권을 제한하는 내용이다. 현행법은 보험사의 계열사에 대한 주식보유 한도가 총자산의 3%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지만, 은행권 등 타 금융권과 달리 자산비율 산정 평가기준을 시가가 아닌 취득원가로 적용한다. 만약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면, 보험사의 계열사 보유 지분은 시가로 평가돼 총자산의 3%가 넘는 지분은 매각해야 한다. 6월 기준 삼성생명(301조 4991억 원)과 삼성화재(83조 3730억 원) 자산총계를 대입하면 두 회사는 각각 9조 449억 원, 2조 5011억 원 규모의 주식만 갖고 나머지는 팔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 경우 삼성전자에 대한 지분과 의결권이 급격히 줄어 지배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물산이 삼성생명·화재가 매각한 삼성전자 지분을 매입하는 방안도 거론되지만, 자금이 부족하다. 그간 재계에서 삼성물산이 삼성바이오로직스 보유 지분(43.4%)을 매각해 확보한 현금으로 삼성전자 지분을 늘릴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었지만, 분식회계 수사로 삼바 지분이 묶였다. 기업평가사이트 CEO스코어 박주근 대표는 “삼성물산이 보유한 유동성은 3조 원도 채 안 되기 때문에 삼성전자 지분을 매입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지렛대로 쓰려던 삼성바이오로직스도 활용하기 어려워졌다”며 “이 상황에서 보험업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삼성전자 보유 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크게 상실해 리스크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