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겸 배우 설리. 사진=SM엔터테인먼트
설리는 2015년 홀로서기 이후 각종 논란과 비난에 부딪치면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여 왔다. 특히 악성 댓글(악플)과 전면으로 맞서는 JTBC ‘악플의 밤’ MC를 맡으면서 제대로 된 ‘맞장’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결국 그는 영상 속에서만 영원히 남게 됐다.
비보가 전해진 14일, 연예계는 바쁘게 돌아가던 톱니바퀴를 멈췄다. 뒤늦게 사실을 확인한 설리의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는 모든 소속 연예인의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설리와 연을 맺지 않았어도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다수 방송사와 동료 연예인들도 공개 일정을 일제히 연기하겠다고 밝혔다. 당초 유족들의 의사에 따라 SM엔터테인먼트는 빈소와 장례 일정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설리를 사랑한 사람들을 위해 15일부터 별도 빈소를 차려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사진=설리 인스타그램 캡처
연예계 한 관계자는 설리를 두고 “혼자서 우산도, 바람막이도 없이 칼바람을 맞던 친구”라고 짧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설리는 논란도, 비난도 혼자 감내해 왔다. 2005년 SBS 드라마 ‘서동요’의 선화공주(이보영 분) 아역으로 데뷔 후 2009년 걸그룹 f(x)로 가요계를 평정한 설리는 6년 만인 2015년 8월 그룹을 탈퇴하고 다시 배우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 같은 설리의 결정은 그를 사랑한 팬덤에 큰 배신으로 받아들여졌다. 탈퇴에 앞선 2013년께부터 f(x) 활동에 전념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불거졌고, 이듬해 14살 연상의 래퍼 다이나믹 듀오 멤버 최자와 열애설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팬들의 실망이 커진 탓이었다. 설리가 밝혔던 그룹 활동 중단 이유는 악플과 루머로 인한 정신적인 스트레스였지만 팬들은 믿지 않았다.
연예활동에서 ‘팬’이라는 가장 큰 우군을 잃은 뒤 설리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온전히 홀로 감내해야 했다. 설리의 고통을 그의 남자친구도, 소속사도 제대로 막아주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설리. 사진=박정훈 기자
누구도 완벽하게 막아주거나 다른 길을 가리켜 주지 않은 설리에게 쏟아진 비난은 주로 그의 ‘선정적인 이미지 소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2015~2016년, 배우로 노선을 바꾸고 기존 소녀 같은 이미지에서 다소 퇴폐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를 추구했던 그를 두고 “스스로를 성적 대상화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2016년 어린 소녀에 대한 성적 욕망을 콘셉트로 삼는 사진작가 로타와 함께 작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설리는 더 큰 논란에 직면했다. 앞서 최자와 연애에서는 남성들이 비난과 모욕을 가했다면, 이 문제는 여성들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2014년부터 사회 전반에 강한 페미니즘 기류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설리의 행동은 시대를 역행하고, 여성들을 배신하는 행위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설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부터다. 지난 4월 설리는 로타와 작업한 사진을 SNS에서 모두 삭제했고, 낙태죄 폐지에 대해 긍정적인 게시물을 올리는 등 페미니스트 행보를 보였다.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검열했던 대중도 환호를 보냈다.
이전부터 노브라를 고집해 오며 “여성의 몸을 성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이 문제”라고 지적한 그의 의식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를 미워했던 대중이 조금씩 마음을 주기 시작하면서 설리의 ‘당당한 행보’에 기대감이 모이던 차였다. 악플에 당당히 맞서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보여줬던 ‘악플의 밤’에서 MC로 활약하며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고작 반 년 만에 물거품이 됐다.
사진=설리 인스타그램 캡처
설리는 지난 14일 오후 3시 21분께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자신의 집 2층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그는 오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공황장애를 호소하고 있었고, 전날 매니저와 마지막으로 통화했다. 통화가 끝난 후 연락을 받지 않는 설리를 걱정해 집을 방문한 매니저가 그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곁에는 유서로 추정되는 심경을 담은 메모도 함께 발견됐다. 평소 사용하던 다이어리의 맨 마지막 장에 남겨져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메모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짧게 밝혔다.
앞의 연예계 관계자는 이번 일을 두고 “설리는 남성과 여성 어느 쪽에게도 마음 놓고 응원받지 못했고 철저한 자기 편이 없었다”며 “무슨 일을 하든 악플이 쏟아졌는데, 겉보기에는 담담하고 의연해 보이니까 더 기를 쓰고 들러붙은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 관계자는 이어 “또 몇 번이나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배우를 지키지 못한 소속사를 탓하고 싶진 않다”며 “사람들이 변해야 한다는 걸 먼저 알았으면 좋겠다. 몇 명의 연예인을 더 잃어야 깨닫고 멈출 건가”라고 한탄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