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군 창설 이래 비 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사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은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진상규명이 된 13건 가운데 6건을 발표했다. 발표되지 않은 나머지 사연을 일요신문에서 연재한다. |
[일요신문] “이거 해결되는 거나 보고 갔으면 좋았을 것 아닌가.”
89세 고령인 김권식 씨가 올 1월 세상을 떠난 아내를 두고 한 말이었다. 김권식 씨는 40년 전 군대에서 죽은 아들 김용주 씨(당시 21세) 명예를 2019년 9월 되찾았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김 씨의 아들 용주 씨가 개인적인 사유가 아닌 부대 내 부조리로 인해 자해사망에 이르게 됐다고 밝혀냈다. “이제 덩실덩실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다”던 김 씨는 이 소식을 듣지 못하고 먼저 간 아내 생각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김권식 할아버지(89)는 군대에서 죽은 아들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40년을 싸웠다. 지난 9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아들의 죽음은 개인적인 사유가 아닌 부대 내 부조리 등 구조적 문제로 발생했다고 밝혀냈다. 사진=박현광 기자
벌써 40년이 흘렀다. 1980년 3월 6일 군대에 간 아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은 신병 교육이 끝난 뒤 4월 19일 동두천에 있는 통신대대 본부중대에 배치돼 사진영사기수리병으로 근무했다. 6월 9일 뙤약볕이 내리쬐기 시작할 때였다. 아들은 전입 2개월도 안 된 시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들은 경계근무를 서던 초소 앞에서 누운 채로 발견됐다. 자신이 휴대하던 M16 소총에 상복부 관통상을 입은 상태였다. 딱 한 발의 격발이었다. 후번 근무자 윤 아무개 씨가 용주 씨를 처음 발견했을 땐 약간의 온기만 있을 뿐 반응이 없었다. 군의관 두세 명이 달려들어 심폐소생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군은 아들을 비 순직 처리했다. 불명예였다. 헌병대는 사고 다음 날 아들이 빈곤한 가정형편과 군 복무에 염증을 느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다. 아들 시신을 확인하러 간 김 씨에게 당시 부대 책임자는 “자살한 사람은 우리가 책임지지 않는다. 당장 시체 가져가라. 가매장하겠느냐, 인수해 가겠느냐”고 윽박질렀다.
아버지 김 씨는 군 간부의 기에 눌려 아무 소리도 못 했다. 당시는 군 위세가 남달랐다. 아내는 관 속에 누워 있는 아들을 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엎어져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아들을 화장해 부대 인근 야산에 뿌렸다. 아직도 그때 맞서지 못한 게 한으로 남는다.
김 씨는 군 수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김 씨는 서울 효자동에서 두부공장을 운영했다. 직원 3명을 채용할 정도였다. 남부럽지 않은 형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에 낙방한 아들이 사진 기술을 배운다고 했을 때 5만 원짜리 사진기를 사줄 수 있었다. 5만 원은 당시 공무원 월급에 맞먹는 돈이었다. 아들이 빈곤한 가정형편을 비관해 세상을 등졌다니 납득할 수 없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소극적이진 않은 아들이었다. 동생도, 부모도 살뜰히 챙겼다.
군은 아들 김용주 씨의 여동생이 보낸 편지를 근거로 들었다. 편지엔 “직장을 그만둬서 생계가 곤란하다”고 적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여동생은 그런 편지를 보낸 기억이 없었다. 또 아들이 군대 동기인 정 아무개 씨에게 “군대 생활 지겨워서 못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군은 설명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들이 군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건 당연했다.
아버지 김 씨는 군을 상대로 싸움을 시작했다. 하지만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1992년 육군본부는 김 씨의 민원을 받아들여 재조사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2006년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호소해봤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당시 헌병대 수사 결과를 믿을 수 없지만 아들의 정확한 사망 동기를 알기 어렵다며 조사를 마무리했다.
아들의 죽음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억울함과 비통함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김권식 씨와 그의 아내는 꼬박 두 달을 방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공장을 운영하지 않으니 단골이 떨어져 나갔다. 결국 두부 공장도 접었다. 사진은 물론이고 아들 생각이 나게 하는 물건은 모두 버렸다.
아들의 죽음으로 집안 살림은 엉망이 됐다. 김권식 할아버지는 아들이 생각나게 하는 물건은 남기지 않고 모두 버렸다. 사진=박현광 기자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들의 사연은 부끄러운 이야기 취급받았다. 친척들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속에서 화가 올라와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어 날달걀에 소금을 풀어 마시면서 연명했다. 김권식 씨의 말이다.
“2년 동안 살림을 할 생각도 못 했지. 집에 있으면 답답해서 낚시하고 등산하고 밖으로 다녔어 혼자. 누가 보면 아들 잃은 아버지가 놀러 다닌다고 손가락질할까 봐. 누구 아이 돌잔치 한다고 하면 돈만 보내고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자격이 없으니까.”
김 씨는 2018년 11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89세 노인에겐 마지막 시도나 다름없었다. 위원회는 지난 2월 조사를 개시했다. 아들 용주 씨 동기와 선후임, 간부 등 부대 관계자 9명을 상대로 조사하고 과거 기록과 대조한 결과 당시 부대 내 구타와 가혹행위, 말뚝근무 등 부조리가 만연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용주 씨 후임 유 아무개 씨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 “자대 가자마자 맞았다. PVC 파이프로 맞아 살이 터졌는데 졸병이라 씻지도 못했다. 곪아서 의무대 간 적만 세 번 정도”라고 말했다. 구타뿐 아니었다. 다른 후임 손 아무개 씨는 “군기가 셌다. 큰 양초를 페치카에 올려둔 뒤 다 탈 때까지 얼차려를 받았다. 삐삐 선을 감아 전기고문을 당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용주 씨가 일명 말뚝근무를 섰다는 정황도 있다. 사건 당일 후번 근무자이자 선임이었던 윤 아무개 씨는 “망인이 당시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근무였던 걸로 기억한다”고 증언했다. 군 헌병대 수사 기록엔 후번 근무자가 7시 30분에 교대를 나섰다고 돼 있다. 하지만 윤 씨는 자신이 새벽 6시 근무였다고 기억한다. 용주 씨가 2시부터 6시까지 말뚝근무를 섰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부대엔 선임들은 기피 시간인 새벽 2시부터 6시까지 근무를 서지 않는 관행이 있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조사를 바탕으로 용주 씨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부대 관리·감독 소홀로 결론 내렸다. 국방부 최종 승인이 떨어지면 용주 씨는 40년 만에 순직 군인으로 명예를 회복한다. 아버지 김권식 씨는 요즘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기뻐서 꿈인가 생신가 도장을 마지막에 찍어봐야 알겠어요. 조사관들에게 어찌나 감사한지 몰라. 용주가 꿈에 나와요 요즘. 열한 살인가 열두 살 정도 먹은 모습으로요. 말은 안 하고 웃으면서 동생이랑 놀더라고. 이제 아들이 국립묘지에 이장되는 거 보면 난 죽어도 여한이 없어.”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비 순직 처리된 사망 군인 유가족에게 2020년 9월 13일까지 진정 신청을 받아 2021년 9월 13일까지 조사를 이어갈 예정이다. 마음이 급하다. 상당수 유가족이 용주 씨 어머니처럼 돌아가셨거나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김용주 씨 사건을 담당한 신헌주 조사관은 “김권식 할아버지 따님이 처음엔 ‘국가가 버린 사람들’이니 진정을 그만하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규명이 된 뒤에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하는 걸 보고 나도 눈물이 났다”며 “내 가족의 아픔이라 생각하고 과거에 묻혔던 사건에 대하여 더욱더 열심히 조사해서 진정인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겠다”고 전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