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유미. 사진=매니지먼트 숲 제공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유미는 짧은 커트 머리에 검은 폴라 티셔츠, 청바지를 입은 소탈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캐스팅 때부터 제작발표회, 제작보고회, 언론배급시사회 기자간담회까지 같은 질문을 받은 탓인지 조금은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답은 한결 같았다. 논란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받았던 감정을 영화로 오롯이 전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는 것이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접하기 전에 먼저 영화 시나리오부터 읽었어요. 왜 논란이 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다양한 시각도 있을 수 있으니 ‘아, 이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다른 의견도 이해를 해보자는 입장이에요. ‘82년생 김지영’을 다른 시각으로 봤어도 아직 표현해주지 않으신 분들도 있을 테니까. 어떤 의견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누군가는 그의 선택을 두고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고 치켜세운다. 이미 지난 14일 언론배급시사회 기자간담회에서 정유미는 “용기를 내야 할 곳은 많다”며 자신의 선택이 굳이 칭찬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그의 입장은 같았다.
“많은 분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냐’고. 그런 문자들을 받았을 때는 ‘이게 그 정도의 일이었나’ 싶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계시구나’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렇다고 뒤늦게 덜컥 겁이 나거나 그런 적은 전혀 없어요. 이 이야기를 만들고, 가고자 했던 마음이 하나였기 때문에 그런 게 방해가 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정유미가 김지영이 되기 위해 가장 고민했던 지점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김지영이 그리는 여성들의 보편적인 삶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그가 그 감정과 이야기를 온전히 관객들에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은 여기였다고 했다.
“제가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지영이’로 잉태시키는 게, 무심한 제가 배우라는 이유로 이런 위로를 전한답시고 표현을 하는 게 맞나 고민했어요. 저는 가족들한테도 되게 무심한 편이거든요(웃음). 막막할 때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촬영장에 가기 전에 시나리오를 천천히 읽었어요.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캐릭터가) 저한테 스윽 하고 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배우 정유미. 사진=매니지먼트 숲 제공
정유미가 극중 김지영처럼 경험해 보지 못한 육아와 결혼생활, 일반적인 사회생활은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아 자연스럽게 표현해낼 수 있었다고 했다. 특히 출산 후유증을 앓고 있는 지영이 손목에 아대를 차고 있는 장면, 벤치에 앉아 유모차를 발로 슬슬 밀어가며 딸 아영이를 달래는 장면은 디테일을 중시한 이 영화에서 가장 깨알 같은 디테일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 모든 게 김도영 감독의 아이디어였다는 게 정유미의 이야기다.
“유모차를 발로 미는 거, 감독님이 많이 하셨대요(웃음). 아들 둘을 키우고 계시거든요. 극중에서 보이는 장면 중에 감독님이 만들어주신 디테일이 많아요. 지영이 손목에 찬 아대도 그래요. 제 주변 지인도 아대를 차고 있더라고요. 그게 또 연기를 하고 나니까 보이더라고요(웃음).”
극중 김지영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때로는 그의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 안에 켜켜이 쌓여 있던 속마음을 바깥으로 꺼낸다. ‘빙의’로 표현되는 이 장치를 연기하면서 정유미는 톤의 색보다 그 강도를 조절해 있는 그대로 감정을 전달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고 설명했다.
“빙의를 표현하는 데에 감독님도 저도 여러 가지 톤을 고민했는데, 그것보다 감정을 잘 전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지영이라는 인물을 빌려서 엄마나 할머니나 친구가 하는 이야기인데, 그건 지영이도 모르게 안에 쌓여 있었던 감정인 거죠. 만일에 진짜 ‘빙의’하면 생각나는 것처럼 제가 막 ‘확!’ 하고 연기했다면 영화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을까요? 이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웃음).”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빙의 외에 정유미가 꼽았던 ‘82년생 김지영’의 인상적인 신은 두 곳이었다. 하나는 어린 지영이 엄마와 나누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조금씩 자신의 입으로 속마음을 꺼내기 시작한 지영이 아이를 데리고 있는 자신을 비난하는 남녀에게 따지는 장면이다.
각각 선생님이 되기를 꿈꿨던 엄마가 꿈을 포기하고 지영의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에게 유독 각박한, 이른바 ‘맘충 논란’을 다뤘다. 비교적 최근 만들어진 이 불쾌한 신조어에 정유미는 “이런 말 자체가 언급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장면에서 제가 그 사람들에게 ‘왜 다른 사람들한테 상처 주려고 애 쓰세요’, ‘저를 아세요’라고 물어요. 저뿐 아니라 많은 분이, 많이 그런 일을 겪으시는 것 같아요. 저도 다른 사람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말하지 않았나 반성하고 또 저를 되돌아보게 되더라고요. 가장 생각에 남는 장면인데, 한편으로 일단 극중에서는 ‘맘충’이라는 말이 나오긴 하지만 이런 말 자체가 기사로 언급되는 것도 조금 그래요. 요즘 (세상이) 그렇잖아요.”
정유미가 말한 ‘요즘 세상’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언제든지 물어뜯을 준비가 돼 있고, 또 그런 발판을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논란에 휩쓸려야 할 이유는 없지만, 눈과 귀를 닫고 ‘마이 웨이’를 갈 수도 없는 것이 관객들의 평가를 앞둔 배우들의 마음이다. 그러나 정유미는 달랐다. 정면으로 맞서지는 않아도 유연하게, 영화 속 이야기처럼 흘러가는 대로 흐르게끔 놔두겠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너무 아깝잖아요, 그렇게 (논란으로) 소비되는 시간들이. 하루하루가 너무너무 빠르게 지나가는데, 충분히 나누고 또 공감할 수 있는 일들이 그런 것 때문에 망가지거나 없어지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에요. 그렇게 (안 좋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표현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는 그런 사람들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다들 스트레스를 조금 덜 받으셨으면 좋겠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