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승계 과정에는 ‘작업’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2세 또는 3세가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재산을 불려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고, 지주사 전환과 자사주 매입 등으로 최대주주에 오르는 방식이 ‘승계 방정식’으로 통해왔다. 다만 이 전통적인 방식들은 합법과 불법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만큼 사회적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최근 수년 사이 세대교체 중인 재계는 눈총도 피하고 작업도 완수해야 하는 공통의 숙제를 안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재계와 증권가 눈길을 끄는 곳이 나타났다. CJ그룹과 아모레퍼시픽이다. 두 회사는 ‘신형우선주’ 발행이라는 공통의 키워드를 갖고 있는데, 이들은 승계와는 전혀 관계없다고 선을 긋지만 업계에선 전통적인 승계 방식에서 넘어서 새로운 시도가 자리 잡고 있다고 평가한다.
신형우선주는 보통주와 우선주 간 가격 차이를 줄이기 위해 고안된 우선주다. 의결권이 없어 보통주보다 30~40% 할인된 값에 거래되는 대신 현금배당을 더 받는다. 배당만 받고 경영참여는 할 수 없는 점은 단점으로 볼 수 있지만, 특정 조건이 붙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정 기간(약 10년)이 지나면 보통주로 전환되는 권리다. 만약 오너가 이 조건이 붙은 신형우선주를 2세 또는 3세에게 증여하면, 보통주보다 저렴한 만큼 세금은 줄이면서도 장기적으로는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보통주 지분율을 확대할 수 있다. 승계에 상당히 유리해지는 셈이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사진=박정훈 기자
#아모레퍼시픽, 오너 3세 회사 복귀와 맞물려 신형우선주 발행
중견그룹 A 사는 최근 승계 작업을 준비 중이다. 회사 법무팀과 재무팀은 물론, 회계법인과 컨설팅 업체들과도 머리를 맞대고 장기적인 플랜을 짜고 있다. 다양한 방법들이 거론되고 있지만,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CJ와 아모레퍼시픽의 사례다. 이 회사 고위임원은 “신형우선주 발행과 승계가 겹쳐 이슈가 된 곳은 그동안 거의 없었다”며 “두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모레퍼시픽그룹(아모레G)은 최근 발행가액 2만 8200원에 신형우선주 709만 2200주를 발행한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총 2000억 원의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며, 이 가운데 1600억 원은 아모레퍼시픽 지분을 취득하는데 쓰고 400억 원은 오설록 출자금 등에 사용할 예정이다. 아모레퍼시픽 지분 취득에는 아모레G의 현금 400억 원도 추가로 쓰인다.
재계와 증권가에선 경영권 승계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서경배 회장의 장녀 민정 씨가 학업을 마치고 지난 10월 1일 회사에 복귀했는데, 이 시점과 맞물려서다. 민정 씨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아모레퍼시픽 오산공장에서 업무를 시작했다가 퇴사했다. 이후 중국에서 MBA과정을 밟은 뒤 최근 아모레퍼시픽 뷰티영업유닛 뷰티영업전략팀 담당으로 회사에 재입사했다. 직급은 과장급으로, 아모레퍼시픽의 화장품 영업을 총괄하는 자리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승계와는 무관하다고 선을 긋는다. 회사 관계자는 “안정적인 경영을 위해 자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것”이라며 “최근 오설록을 별도법인으로 떼어낸 데 따른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회사 설명대로 지배구조강화 목적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아모레G가 아모레퍼시픽 주식 2000억 원가량을 매입하면 현재 보유 지분이 35.4%에서 3.7%로 2.3%포인트 증가하는 데 그칠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발행된 신주에는 10년 뒤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조건(전환우선주)이 붙었다. 지금은 의결권이 없지만 10년 뒤 일대일 비율로 보통주로 전환된다. 배당수익률도 2.5%로 비교적 높게 책정됐다. ‘승계 재원 마련’이라는 분석에 힘이 더 실리는 이유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서민정 씨가 10대 때인 2006년에도 신형우선주를 발행했다. 현재 서 씨가 보유한 아모레G 지분 2.93%는 이때 확보한 것이다. 당시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서 회장으로부터 아모레퍼시픽 구형우선주를 증여 받아 신형우선주로 교환했고, 2016년 보통주로 전환됐다. 이때 신형우선주인 ‘아모레2우B’는 보통주보다 절반가량 가격이 낮았다. 현재 서민정 씨는 서경배 회장(51.29%)에 이어 아모레퍼시픽그룹 개인 2대 주주다. 또 서 씨는 서 회장의 지분 증여로 계열사인 에뛰드(19.5%), 에스쁘아(19.52%), 이니스프리(18.18%) 등의 2대 주주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서울 남대문로5가에 위치한 CJ 본사 전경. 사진=일요신문DB
#‘승계 공식화’ 평가 받는 CJ그룹도 신형우선주 발행
올해 승계를 사실상 공식화했다는 평가를 받는 CJ그룹도 모든 주식에 대해 주당 신형우선주 0.15주를 지급하는 주식배당을 결정했다. 신형우선주인 ‘CJ4우’는 보통주 전환 전에는 액면가 기준으로 2%를 우선 배당하는 조건이 붙어 있다. 보통주보다 많은 배당을 받는 만큼 현금을 확보할 수 있고, 역시 10년 뒤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다. CJ4우는 지난 3월 말 발행됐다. 8월부터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돼 거래 중이다.
1990년생으로 아직 20대 후반인 CJ그룹 3세 이선호 씨가 이 신형우선주를 확보하면 30대 후반에 접어들 때 의결권이 있는 보통주로 바꿀 수 있다. 부친인 이재현 회장으로부터 증여를 받을 수도 있다. CJ 최대주주인 이 회장은 신형우선주 184만여 주를 보유하고 있다.
동시에 CJ그룹은 이선호 씨가 지분 17.97%을 갖고 있던 CJ올리브네트웍스에서 정보기술(IT) 부문을 떼어내 지주사의 100% 자회사로 만들기로 했다. 분할비율은 IT사업부문 45%, 올리브영 55%로 정했다. 분할 및 편입 과정을 통해 이 부장은 CJ지주사 지분 2.8%를 확보하게 됐다. 이 부장이 CJ 주식을 보유하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후계자의 계열사 지분 확보로 시작해 그 계열사의 덩치를 키우고, 지분을 지주사 인수 재원으로 사용하는 전통적인 ‘승계 방정식’에 신형우선주 발행이 더해진 셈이다.
이에 대해 CJ그룹은 현재 승계를 진행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계열사 합병과 우선주 발행은 승계와 전혀 관계없다는 입장이다.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 않으니 지난 9월 이선호 씨의 마약 밀반입 적발 역시 승계와 연결해서 볼 이유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회사 관계자는 “신형우선주 발행은 경영권 승계로 연결 짓는 것은 추측에 가정이 더해진 것”이라며 “이번 분할과 합병 과정에서 이선호 부장이 확보하게 된 지분도 승계를 이야기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첨단기술을 접목한 미래지향 신사업, IT사업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수적인 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승계와 관계 없다는 CJ그룹과 아모레퍼시픽 그룹의 설명과는 별개로, 재계와 증권가에선 향후 신형우선주 발행을 활용한 승계 방식이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그동안 여러 방안 중 하나로만 통했던 이 방식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곳들이 생겨나면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우선주 상장 요건도 최근 완화됐다. 공모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했지만 최근 한국거래소 규정 개정으로 분산 요건만 충족되면 공모가 면제된다”며 “승계 목적으로 활용되는 사례가 더 늘어날 수 있다”고 관측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