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만의 평양 남자대표팀 축구경기는 희대의 논란거리를 남기고 마무리됐다. 0-0 무승부로 끝난 경기지만 한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 스포츠계에서 오랜 기간 회자될 에피소드를 북한 당국은 만들어 냈다. ‘희한한 경기’ ‘깜깜이 축구’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상황의 연속이었다는 게 대한축구협회(KFA)와 대표팀 선수,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다치지 않고 돌아온 게 다행”이라는 손흥민(영국 토트넘) 선수의 귀국 후 언급에는 작심한 듯 거칠게 나온 북한 대표팀 선수들과 경기장 분위기가 녹아있다.
29년 만에 평양에서 열린 남북 남자축구 대결은 무관중 경기로 진행되는 등 희대의 논란거리를 남기고 마무리됐다. 사진=TASS/연합뉴스
가장 큰 문제는 북한 측이 월드컵 예선 차원에서 치러진 남북 축구 대결을 관중 없이 진행한 대목이다. 우리 국민과 축구팬들의 관심이 쏠린 국제경기인 만큼 적정 규모의 응원단을 파견하겠다는 통일부의 제안을 북한은 거부했다. 우리 측에선 북한의 일방적 응원 속에 경기가 치러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북측은 경기 하루 전 협의 때까지도 4만 명 규모의 관중이 들어찰 것으로 운을 뗐다. 하지만 경기장에 들어선 우리 선수단과 대표팀 관계자들은 텅 빈 스타디움을 보며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 현장을 참관한 잔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도 실망감을 드러낼 정도였다.
경기 장면 생중계의 무산은 축구팬과 국민들로부터 큰 반발과 비판을 샀다. 당초 북한은 우리 방송 3사(KBS·MBC·SBS)에게 중계를 약속하고, 중계권 계약료 명목으로 17억 원을 챙겼다. 하지만 경기가 임박해서야 “일체의 홍보를 하지 말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며 생중계를 거부했다. 대신 경기장면을 담아 전달하겠다는 뜻을 전해왔고, 우리 방송사들은 녹화중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북한이 전달한 화면은 HD급이 아닌 저화질(SD)인 데다 화면 비율도 달랐다. 이 때문에 북한이 격렬하게 우리 선수들을 몰아세운 비신사적 장면의 실시간 노출을 피하려 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우리 방송사들이 화질 문제를 이유로 녹화중계마저 포기하면서 ‘북한 눈치를 본다’는 비난까지 쏟아지는 국면이 연출됐고, 제소나 계약료 환수 주장까지 나왔다.
경기 내용면에서도 심각한 상황은 이어졌다. 킥오프 휘슬이 울리자마자 북한 선수들은 거친 태클과 함께 신체 가격, 밀치거나 잡아당기기, 교묘한 파울 등 반칙을 연발했다. 홈그라운드에서의 무관중 경기인 데다 중계 카메라 시스템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염두에 둔 듯한 행동이었다는 게 우리 측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우리 미드필더 황인범이 북한 선수로부터 심하게 가격당하는 장면에서는 남북한 선수들이 뒤엉켜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손흥민과 북한의 이영직 선수가 나서 후배 선수들을 만류하면서 가까스로 수습되는 아슬아슬한 모습이 드러났다. 북한 선수를 퇴장시킬 정도의 파울이 몇 차례 나타났지만 주심은 북한의 상황에 심리적 압박을 받은 때문인 듯 못 본 체 넘겼다는 말도 나온다.
북한은 평양 남북 축구대결을 마뜩지 않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지못해 한국과의 경기를 치르고 선수단을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였다. 이런 분위기는 월드컵 예선전을 준비하는 우리 대표단 관계자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줬다.
통상 국가대표급 경기를 의미하는 A매치를 치르려면 늦어도 보름 전에는 팀 관계자가 경기장을 방문해 그라운드 상태와 부대시설, 숙소와 식당 시설 등을 점검해 준비 작업을 해야 한다. 하지만 북한은 경기 직전까지도 일정협의에 나서지 않아 대표팀의 속을 태우게 했고, 우리 측의 방북을 허용하지 않는 ‘몽니’ 수준의 행태를 보였다. 그러다보니 국제경기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 인조잔디 구장인 김일성경기장의 컨디션에 적응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평양 입성 과정에서 벌어진 우리 대표님 홀대 사태도 논란으로 남았다. 북측이 육로방북을 불허한 데 따라 우리 대표선수단은 중국 베이징을 경유하는 항공로를 이용해야 했다. 평양 순안공항에선 X레이 검색대가 있는데도 선수단에게 짐과 물품 목록을 일일이 적어내게 했다.
식사제공을 위해 공수해 간 고기와 해산물 식재료 세 박스를 압수하기도 했다. 결국 경기 하루 전인 14일 오후 4시께 순안공항에 도착한 대표단은 3시간가량 진을 뺀 후 시내 고려호텔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과거 남북 당국회담이나 민간 방북단 교류 행사의 경우 짐을 검사하지 않고 통관시킨 경우도 많았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훼방 놓기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우리 선수단은 북한 측의 깐깐한 태도 때문에 2박 3일 체류 기간 동안 적지 않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휴대폰 반입을 불허하겠다는 입장을 통보해와 선수단은 베이징 주재 한국 대사관에 맡겨놓고 평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알람 기능을 갖춘 휴대폰 없이 방북하게 되자 축구협회 측은 아침 기상용 알람이 울리는 탁상시계 32개를 급히 구매해 각 선수들의 방에 비치해야 했다. 책이나 신문의 반입도 금지됐고, 숙소인 고려호텔의 로비 밖으로 나가는 행동도 차단됐다. 옥류관 냉면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기대했지만 북한 측은 곧바로 공항으로 우리 선수단을 안내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올랐다고 조선중앙TV가 지난 16일 보도했다. 사진=연합뉴스
월드컵 예선 평양 남북대결을 둘러싸고 나타난 북한의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행동은 현 남북관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노딜’로 끝나자 북한은 대남비방 쪽으로 돌아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4월 최고인민회의(우리의 국회에 해당) 시정연설에서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를 하지 말라”며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 비난을 퍼부었다.
이후 북한은 우리 정부를 향해 한-미 합동군사연습의 중단과 F-35A 스텔스 전투기 반입 중지 등의 무리한 요구를 내세우며 대립각을 세워왔다. 미국과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친서정치와 러브콜 등 우호적 분위기를 연출해온 것과 확연한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결국 북한은 우리 정부에 대해 누적된 불만을 축구 대표선수단의 방북과 남북 대결과정에서 노골적으로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치·군사적 이슈가 아닌 스포츠 경기를 대남 화풀이 차원으로 몰아가면서 북한 당국도 적지 않은 부담을 떠안게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엇보다 지난해 초 김정은 위원장의 유화국면 전환을 계기로 형성된 외부 세계의 우호적 여론을 단번에 까먹는 패착을 둔 것으로 평가된다.
2012년 집권한 김정은은 스포츠 경기에 있어서만큼은 국제관례와 룰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였다. 국제경기에 참가한 한국선수들에게 편의를 보장하고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 연주 등을 보장하는 장면은 북한이 글로벌스탠더드를 존중하려는 신호탄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김정은 체제의 북한에 대한 한국과 국제사회의 인식은 급락하는 모양새다.
평양에서 관중 없이 경기를 치르고 그 진행상황은 아시아축구연맹(AFC)의 문자중계에 의존해야 하는 모습은 북한에 대한 실망감으로 이어졌다. 90분간의 경기는 단 아홉 줄의 문자로만 전해졌다. 한국의 축구팬들은 “21세기에 축구를 문자로 봤다”며 비아냥거렸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2월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참석해 칙사 대접을 받고,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구성했던 사례를 제시하면서 “평창 때 환대해 준 결과가 이런 것이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경색된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계기로 평양 남북 축구경기를 활용하려던 정부도 당혹스러운 분위기다. 응원단 파견 등 남북 인적교류를 성사시키고, 단장으로 정부 고위 인사를 방북시켜 북측의 입장을 타진하고 당국대화 재개 쪽으로 이어가려던 구상이 물거품이 됐다는 점에서다.
북한 측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우리 국민들의 대북감정이 크게 악화되면서 향후 정책추진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란 우려도 있다. 생중계 불발로 실시간 상황전달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손흥민 등 파급력이 큰 스타급 국가대표 선수들의 입을 통해 북한의 어처구니없는 행태가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칫 문재인 대통령이 제시한 ‘2032년 남북 공동 올림픽 개최’ 문제나 11월 부산 한-아세안 정상회의 김정은 초청 건이 탄력을 받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도 정부의 고민을 깊게 하고 있다.
북한도 이번 사태의 파장을 주시하면서 한국과 국제사회의 여론추이를 관심 있게 들여다 볼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관영 매체를 통해 이를 공론화 하거나 구체적인 사안을 거론하는 건 피하려 들 것으로 보인다. 주민 동원 없이 무관중으로 남북 축구경기를 치른 북한은 그 결과나 관련 소식을 일체 함구하고 있다. 당초 경기를 직접 관람할 것으로까지 점쳐졌던 김정은은 그 시각 북부 지역인 양강도 삼지연 일대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북한 매체들은 전하고 있다.
김정은이 백마를 타고 백두산을 등정하는 장면을 연출해 사진으로 공개한 북한은 “또 다시 세상이 놀라고 우리 혁명이 한 걸음 전진될 웅대한 작전이 펼쳐질 것”이라며 중대결단이나 상황이 전개될 것임을 예고했다. 이를 두고 올 연말까지를 북-미 협상의 시한으로 제시한 바 있는 김정은이 모종의 제안이나 대미 압박조치를 내놓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의 크리스마스 시즌 등을 고려할 때 연말 시한은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셈이다. 문재인 정부도 남북관계의 돌파구 마련과 당국대화 및 교류협력 성과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처지다. 평양 김일성경기장을 진앙으로 하는 충격파가 남북관계와 북-미 협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주목되는 시점이다.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