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7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조추첨식이 열렸다. 조추첨 결과는 아시아 축구팬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C조와 G조에서 각각 서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라이벌 이란-이라크, 베트남-태국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란과 이라크는 1980년대의 전쟁 등 오랜 기간 국가적 갈등을 이어온 관계이기도 하며 베트남과 태국은 동아시아의 한·일전 못지않은 치열함을 자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이들의 대결은 남과 북이 한 조에 편성돼 남북대결이 펼쳐질 H조만큼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북한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한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 세계 각국의 시선이 쏠렸다. 사진은 볼다툼을 벌이는 손흥민(왼쪽)과 한광성. 사진=대한축구협회
조편성 직후 경기가 열릴 장소에도 관심이 갔다. 홈앤드어웨이로 치르는 월드컵 예선 특성상 손흥민을 비롯한 대표팀 선수들의 북한 방문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중립지역에서 경기가 열릴 가능성도 존재했다. 남북한은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3차예선과 최종예선에서 연이어 맞붙었다. 당시 홈경기는 서울에서 열렸지만 원정은 북한 측 선택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모두 치른 바 있다.
북한은 이번 예선에서는 평양 홈경기를 선택했다. 1990년 남북 통일축구 이후 29년 만의 남자 축구대표팀의 평양 방문이 성사됐다. 친선경기가 아닌 대회 타이틀이 걸린 대결은 사상 처음이었다. 지난해부터 거듭된 남북정상회담 등 최근의 남북 화해무드가 반영된 듯 보였다.
하지만 경기가 열리는 10월 15일이 가까워지자 불안한 기운이 감지됐다. 선수단과 관계자, 응원단 등의 방북 논의를 이어가던 중 북측의 답변이 끊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현지 생중계, 응원단 방북이 사실상 무산된 상황에서 KBS는 경기 하루 전날인 지난 14일, 마지막까지 북측의 국제 신호를 받아 스튜디오 중계라도 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이조차 무산됐다.
북한의 까다로운 조건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선수들의 휴대폰, 책 등 반입물품에도 제한을 뒀다. 선수단 식사를 책임지는 조리팀에서 일부 식재료를 챙겨갔지만 이 또한 압수됐다. 이쯤 되니 팬들은 선수들의 안전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지난 13일 출국해 베이징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14일 평양으로 향한 대표팀의 행보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평양에 도착한 대표팀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선수단은 “평양에 오후 4시쯤 도착했지만 공항을 빠져나가는 데 2시간 정도가 걸렸다”고 증언했다. 선수들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적응훈련 일정이 잡혀 있는 김일성운동장으로 향해야 했다. 까다로운 제한에 선수들은 최소한의 짐만 챙겨간 상황이었다. 공항서 지체된 시간에 의문이 따르고 있다.
이날 경기는 남북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관심을 받았다. 지아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도 현장을 찾을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관중석이 텅 빈 운동장에서 경기를 치르리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인판티노 회장조차 경기 후 “무관중 경기에 실망했다”는 소감을 남겼다.
중계·관중조차 없었기에 경기 내용은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문자’에 기대야 했지만 그나마도 경기 내용을 궁금해 하는 이들의 갈증을 해소해주진 못했다. 2~3분 간격, 시시각각으로 경기 상황을 전달해주는 현대의 문자중계와 달리 남북전은 경고와 퇴장, 선수 교체 등 극히 제한적인 정보만 전달됐다. ‘현지 인터넷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였다. 경기는 남북한이 경고 두 장씩 주고받은 가운데 득점이 터지지 않으며 0-0 무승부로 끝났다. 한국은 교체카드를 3장, 북한은 2장을 사용했다.
방송 중계가 무산되자 선수들에게 직접 설명을 들으려는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지난 17일 새벽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하는 선수단 일정에 관심이 쏠렸다. 공항에서 ‘북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선수들의 목소리에선 승리하지 못한 아쉬움과 베이징을 경유하는 경로에 피로감이 느껴졌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북한이 거칠게 나왔다”고 증언했다. 주장 손흥민 선수는 “선수들이 다치지 않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거친 경기였다”고 말했다.
신경전도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 당일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주북한 스웨덴 대사가 자신의 트위터에 경기 영상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영상 속 남북 선수들은 한데 뒤엉켜 신경전을 벌였다. 수비수로 선발 출전한 김진수 선수는 “황인범이 한 대 맞았다. 북한 선수들이 욕을 계속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황인범 선수는 맞은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북한 선수단의 격한 반응에 대해 “끊임없이 벤치 쪽에서 선수들과 관계자들이 소리를 지르더라. 관중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불필요한 말로 저희를 흥분시키려 한 것 같다”고 했다. 인조잔디 경기장으로도 화제가 됐던 김일성경기장에 대해서는 “리그(미국 메이저리그사커)에서도 인조잔디에서 많이 뛰었기 때문에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황인범 선수ㅏㄱ 활약 중인 메이저리그사커(MLS)에서는 일부 팀이 인조잔디 구장을 홈으로 사용하고 있다.
숙소생활에서도 불편함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문환 선수는 “밖에 나가서 구경도 하고 싶었는데 제재가 강했다”고 말했다. 황인범 선수는 ‘평양의 풍경이 어땠나’라는 질문에 “첫날 도착해선 밤이었기에 잘 보이지 않았다. 돌아오는 차에서 잠깐 보기에는 한국의 시골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휴대폰을 베이징에서 반납해 여가 시간을 빼앗긴 상황에 대해서는 선수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황인범 선수는 “휴대폰이 있으면 다들 그것만 쳐다보고 있기도 하는데 덕분에 선수들끼리 대화할 시간이 많았다. 다른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장난도 치고 경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설명했다. 김문환 선수는 “마피아게임도 함께했다”며 선수단내 밝은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축구협회는 휴대폰을 챙기지 못할 선수들의 기상을 위해 자명종 시계를 선수단 숫자에 맞춰 준비하기도 했다.
황인범 선수는 무승부라는 결과에 아쉬워하며 “홈경기에서 실력차가 어떤지 보여주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사진=김상래 기자
29년 만의 평양행은 지원 스태프에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생각보다 북한의 통신환경이 더 안 좋은 것처럼 느껴졌다”는 소감을 남겼다. 대표팀이 평양에 도착한 이후 연락이 두절됐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숙소에서도 통신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관계자는 “숙소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북한 측 관계자에게 요청을 해야 했다. 랜선을 가져와서 연결해줘야 이메일을 보낼 수 있었다. 메일을 작성하는 과정도 일일이 지켜봤다. 전송을 하면 다시 랜선을 빼갔다”고 설명했다. 경기장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협회 관계자는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기자석 한 자리를 배정받았지만 인터넷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이 관계자를 통한 문자중계는 무산됐고 국내에선 아시아축구연맹을 통해 경기 상황을 전달받아야만 했다.
손흥민 선수를 비롯한 선수들은 무승부의 아쉬움을 달래며 다음을 기약했다. “홈에서는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다짐을 남겼다. 북한과 홈경기는 2020년 6월 4일로 예정돼 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