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7일, SK 와이번스와 플레이오프 3차전 승리로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룬 장정석 키움 히어로즈 감독이 경기 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5전 3선승제로 펼쳐지는 플레이오프에서 디펜딩 챔피언 SK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장 감독은 이번 포스트시즌 동안 파격적인 전술로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염갈량(염경엽+제갈량)’이라는 별명의 염경엽 감독과 맞붙어 완승을 거뒀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다. 감독 3년차인 장정석 감독을 향해 ‘명장’의 조건을 갖춘 지도자라고 말하는 이유가 뭘까.
지난 17일 키움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짓고 환호하는 팬들에게 화답하는 장정석 감독. 사진=연합뉴스
장정석 감독은 1996년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했지만 8년 동안 통산 타율 0.215(580경기)를 기록하는 등 별다른 존재감 없이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염경엽 감독이 넥센 히어로즈를 이끌 당시 장 감독은 넥센 1군 매니저와 운영팀장을 맡아 염 감독의 지도력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염 감독이 2016시즌을 마치고 팀을 떠난 후 무명의(?) 장 감독이 사령탑에 올랐을 때만 해도 히어로즈 팬들은 장 감독을 향해 ‘바지감독’ 운운하며 비난을 퍼부었다. 감독은 물론 코치 경력조차 없던 운영팀장이 신임감독으로 ‘승진’한 배경에는 당시 구단주 이장석의 두터운 신임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초보 감독의 2017시즌은 정규시즌 7위로 마무리됐다. 2년차 때인 2018시즌은 정규시즌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SK와 플레이오프에서 5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다 5차전 10회 연장전에서 10-11로 아쉽게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올시즌 다시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은 SK를 상대로 장 감독은 3연승을 이끌며 예상보다 일찍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감독 3년차인 장정석 감독의 지난 이력들을 살펴보면 이장석 전 대표부터 선수들의 잇단 사건 사고들로 힘든 시간을 보낸 부분이 눈에 띈다. 특히 2년차였던 2018시즌에는 박동원, 조상우의 개인 일탈부터 휘문고 시절 학폭에 연루됐던 안우진의 복귀까지 팀은 연일 사면초가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장 감독은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기자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장 감독은 지도자 경험이 없다는 세간의 우려를 성적으로 지워냈다. 매우 치밀하고 영리한 팀 운영으로 선수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다. 그중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건 트레이드였다.
2018시즌을 마치자마자 장 감독은 고종욱을 SK로 보내고 삼성 이지영을 받는 삼각 트레이드를 단행했다(SK는 김동엽을 삼성으로 보냈다). 당시 장 감독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이지영을 영입한 배경으로 이런 설명을 곁들였다.
“올시즌 박동원의 이탈로 포수는 김재현·주효상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김재현이 상무 지원을 한 터라 현재 1군 포수로는 주효상 한 명밖에 없다. 144경기를 나이 어린 주효상한테 맡기는 건 무리였다. 프런트에 포수 영입을 서둘러 달라고 부탁했는데 삼각 트레이드가 이뤄진 것이다. 이지영 같은 베테랑 포수를 영입하기가 쉽지 않다. 강민호가 삼성으로 가면서 이지영의 입지가 애매했는데 그런 아픈 경험들이 내년 시즌 우리 팀에서 보약으로 승화되길 바란다. 이지영의 합류는 분명 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장 감독의 바람은 현실이 됐다. 올시즌 이지영과 박동원을 번갈아 기용하다 박동원이 LG 트윈스와 준PO 2차전에서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이지영은 플레이오프 전 경기 선발 포수로 출전했다. ‘벌떼 야구’를 시전하며 상대를 침몰시킨 벤치의 마운드 운용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가 포수 이지영이었다. 타석에서도 이지영은 돋보였다. 플레이오프에서 타율 0.364(11타수 4안타) 1타점으로 매서운 타격감을 뽐냈다. 삼성에서 강민호의 백업 멤버였던 이지영이 키움의 가을 야구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2018 시즌을 앞두고 삼각 트레이드로 키움에 입단한 포수 이지영(왼쪽)은 포스트시즌에서 존재감을 발휘했다. 사진=연합뉴스
키움의 파이어볼러하면 안우진이 떠오른다. 정규시즌 선발로 나와 7승 5패 평균자책점 5.20을 기록했던 안우진은 포스트시즌 동안 불펜 요원으로 변신, 마운드에 힘을 보태고 있다. 안우진은 히어로즈 입단 전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고교 시절 학교 폭력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히어로즈 지명을 받은 후 자체 징계를 거쳤고, 뒤늦게 1군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 장 감독에게 안우진을 1군 선발로 내세우기까지 고민이 많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안우진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나도 아들 둘이 야구를 한다(큰아들이 덕수고 장재영). 우진이를 처음 대면할 때는 감독보다는 부모 마음이 앞섰다. 자신의 잘못으로 여러 선수들이 상처를 입었고 지금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진이가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야구를 해야 하는 선수 아닌가. 감독 입장에선 우진이의 인성은 물론 야구에 대한 마음까지 살펴봐야 했다. 50경기 출장 정지 징계가 끝나는 시점에 복귀 절차를 밟았는데 스프링캠프를 함께 하지 못했던 부분이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우진이의 과오가 야구로 용서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잘못을 반성하고 노력하다 보면 그한테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안우진은 지난 포스트시즌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올시즌에도 키움의 두 번째 조커 카드로 활약하며 조상우 앞에 등판한다. 벤치의 두터운 신뢰가 안우진의 재기를 도운 것이다. 만약 장 감독이 여론의 부정적인 반응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안우진을 외면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장 감독은 자신이 감독으로 선임됐을 때 일부 팬들이 자신에게 어떤 내용의 비난을 가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 기사 댓글에 올라온 내용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나보다 그런 내용을 봤을 가족들을 생각하니까 감정이 제어가 안 되더라. 평생 먹을 욕을 2017시즌에 다 먹은 것 같다. 그 욕먹은 게 아까워서라도 결과로 평가받고 싶었다. 당시 내 모자에다 ‘무조건 이겨라’라는 문구를 적어 놨다. 난 무조건 이겨야 하는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날 강하게 자극해준 덕분에 더 노력했고 악착같이 버틸 수 있었다. 감독이란 자리는 사람을 자꾸 독하게 만드는 것 같다.”
2014년 히어로즈는 보스턴 레드삭스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면서 히어로즈 구단 직원들을 순차적으로 레드삭스로 보내 연수를 받게 했다. 당시 1군 운영팀 과장이던 장 감독도 3주간의 일정으로 레드삭스의 연수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장 감독은 그때 연수받은 내용을 감독이 돼 팀 운영에 적용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고 한다.
“우리 팀은 스프링캠프가 시작되기 1주일 전 먼저 1, 2군 코칭스태프가 모여 훈련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토론하면서 캠프에서 진행되는 내용들을 완벽히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 시스템이 오래 전부터 진행됐다. 덕분에 1, 2군을 오가는 선수들은 소속이 바뀌어도 별다른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 코치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걸 철칙으로 삼는다. 타격의 달인이라고 평가받는 허문회 수석코치도 선수들의 타격폼 관련해서는 쉽게 조언하지 않는다. 먼저 선수들 얘기를 들어보고 의견이 있을 때는 강병식 코치한테 전달한다. 또 한 가지. 2군에서 1군으로 올라온 선수들은 바로 라인업에 넣어준다. 1군에서도 그 실력이 통하는지 확인하는 게 내 일이고,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선수인지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2군 선수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다.”
키움의 한국시리즈 진출이 확정된 후 허구연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과 전화 연결이 닿았다. 허 위원은 키움이 포스트시즌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배경에는 장정석 감독의 남다른 팀 운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방송 해설 앞두고 감독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가장 긴 시간 동안 야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장정석 감독이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야구를 공부하고 팀 운영에 접목시키기 위해 전력분석팀을 아주 잘 활용하고 있다. 당장 내일, 다음 주의 경기가 아닌 한 달 이후의 상황을 미리 계산하고 준비하는 모습에 무릎을 친 적도 있었다. 지금 키움의 마운드 운용을 보면 데이터 분석을 통한 적절한 선수기용과 맞춤형 휴식, 훈련 프로그램 제시 등으로 선발과 불펜 전체를 탄탄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장 감독은 애리조나 캠프에 가서도 현지 대학 팀이나 마이너리그 팀이 어떤 시스템으로 운영되는지 관심 있게 살펴본다. 내가 아는 국내 감독들 중 가장 많이 공부하는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장 감독에게 ‘믿음의 야구’가 무엇인지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그 답을 이렇게 설명했다.
“믿음이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기회를 줬는데 실수했다고 내치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기회를 준다. 그럴 경우 선수들의 플레이에 변화가 생긴다. 과정을 통해 서로를 향한 신뢰가 형성된다면 믿음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공교롭게 두산 베어스 김태형 감독과 키움의 장정석 감독은 올시즌을 마치고 계약이 만료된다. 두산의 왕조 시대 재현을 목표로 하는 김 감독과 히어로즈의 사상 첫 한국시리즈 우승에 발을 내딛은 장 감독이 시즌 후 재계약에 이를지, 재계약을 한다면 어떤 규모의 계약을 이끌어낼지도 궁금하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