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B하나은행이 금융감독원 조사 직전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관련 자료를 삭제한 것으로 드러난 가운데 이에 대한 고의성을 두고 하나은행과 금융당국 간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지난 21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의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등의 종합 국정감사에서 김동성 금융감독원 부원장보(왼쪽)가 하나은행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의 대규모 손실 사태와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10월 21일 국회 정무위원회의 금융위원회·금감원에 대한 국감에서는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됐다. 국감 증인으로 출석한 김동성 금감원 은행담당 부원장보는 이날 DLF 사태에 관해 증언하면서 돌연 “지성규 행장이 DLF 현황 파악 자료를 만들라고 지시한 뒤 이를 고의로 숨겼다”고 폭로했다. 김동성 부원장보의 이 발언은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과 김종석 자유한국당 의원이 자료 삭제 관련 사실 관계를 집중적으로 추궁하는 질의에 대해 금감원이 답변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앞서 지난 8일 지상욱 의원이 하나은행의 DLF 관련 자료 삭제 사실을 폭로하자 하나은행은 “현황 파악, 내부 참고용으로 보관할 필요가 없어 삭제한 것”이라며 “검사 계획이 확정·발표되기 전에 이뤄졌다”고 해명한 바 있다. 하지만 김 부원장보는 이날 “지성규 은행장의 지시로 1차, 2차에 걸쳐 전수조사를 한 결과를 담은 자료가 삭제됐다”며 “하나은행은 전수 조사한 파일을 금감원이 발견하기 전까지 고의로 은닉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부원장보의 폭로에 국감장은 크게 술렁였다. 추궁하던 야당 의원들조차 예상치 못한 수위 높은 발언에 움찔하는 듯했다. 하지만 김 부원장보는 아랑곳 않고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이 자료가 손해배상 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내부 자료”라며 “이는 피해고객에 대한 손해배상을 위해 검토한 자료로 보이며 불완전판매에 관련 내용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금융권은 김 부원장보의 이 같은 행보를 ‘작심 발언’으로 보고 있다. DLF 사태가 하나은행에만 국한된 사안이 아님에도 특정 은행과 은행장까지 콕 집어 말한 것은 ‘저격’이라는 것이다. 만일 하나은행이 전수조사한 자료를 고의적으로 은닉·삭제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대형 사건으로 번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금융권은 이 같은 사달이 난 배경으로 금융당국과 하나금융그룹 간의 기싸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금융과 금감원은 최고경영자(CEO) 거취와 관련해 여러 차례 마찰을 빚어왔다. 대표적인 예가 하나금융그룹 수장인 김정태 회장의 연임 문제였다. 2017년 말, 금감원은 차기 회장 선임절차가 진행 중인 회추위에 ‘하나금융 검사 결과가 나온 이후로 일정을 미뤄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회추위는 일정을 강행해 김 회장을 회장 최종후보로 선정했다.
이후 금융권 채용비리 의혹이 불거지면서 김 회장은 다시 위기에 몰렸지만 오히려 검찰 수사가 결백을 입증해주는 지렛대가 됐다. 검찰은 채용비리와 관련해 수차례 압수수색을 벌였으나 김 회장의 혐의점을 밝혀내지 못했다. 기소된 뒤에도 김 회장은 결국 법원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금융당국의 심기가 불편해졌고, 이는 경영진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금융권의 해석이다. 금융권은 감독당국이 하나금융에 본격적으로 괘씸죄를 묻기 시작한 사건으로 올해 초 있었던 함영주 전 행장의 사임을 꼽는다.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하나은행 본점. 사진=고성준 기자
지난 2월 함 전 행장은 연임포기를 선언하며 은행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애초 하나금융그룹 주변에는 함 행장의 3연임이 확실시된다는 분석이 많았다. 2015년 9월 하나은행과 외환은행 통합 이후 초대 행장 자리에 오른 그는 소통의 리더십으로 양 은행의 통합을 비교적 순조롭게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하나금융의 임원후보추천위원회 열리기 이틀 전 일이 터졌다. 김동성 금감원 은행담당 부원장보가 하나금융 사외이사 3명을 따로 만나 “경영진의 법률적 리스크가 경영 안정성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를 제기했다. 함 행장이 채용비리 의혹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자 분위기가 백팔십도 달라졌다. 함 행장은 연임을 포기했고 임추위는 지성규 부행장을 새 행장 후보로 단독 추천했다. 이를 두고 함 행장이 금감원의 경고를 받아들인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함 행장은 임추위 회의 직후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저만 내려놓으면 조용해질 텐데 괜히 직원들까지 힘들게 만들기 싫었다”고 털어놨다.
눈에 띄는 점은 하나은행 경영진이 위기에 몰리는 장면에도 김동성 부원장보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함 행장 퇴진으로 이어진 사외이사 면담을 했던 인물도 김 부원장보며, 국감장에서 지성규 행장의 지시였음을 폭로한 인물도 그다. 물론 김 부원장보가 은행담당인 만큼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금융권은 “민간 금융사 CEO의 거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에 공교롭게도 금감원 고위 임원이 관련돼 있는 모습이 좋아 보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김 부원장보가 총대를 메는 것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금융권은 지성규 행장을 상대로 한 이번 폭로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결국 함영주 부회장, 나이가 김정태 회장이 최종목표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은행권에서는 김정태 회장의 오른팔로 함영주 부회장을, 왼팔로 지성규 행장을 꼽는다”면서 “함 부회장은 만약 채용비리 수사에서 유죄판결을 받지 않는다면 2021년 임기가 만료되는 김 회장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 이 경우 금융당국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그림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