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이 잡히지 않아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았던 이 ‘태양다방 종업원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 양 아무개 씨가 사건 발생 15년 만인 2017년 경찰에 검거됐다. 하지만 최근 양 씨는 무죄가 확정됐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양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재판을 부산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결국 부산고법 형사1부는 지난 7월 양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은 10월 23일 양 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2002년 부산 강서구 명지동 해안 안벽에서 다방 종업원의 시신이 담긴 마대자루가 발견됐다. 사진=부산경찰청 제공
대법원은 심증은 있으나 범행에 사용된 흉기 등 직접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간접증거의 유죄증명력이 약하다고 봤다. 사건 유력 용의자가 증거 부족으로 풀려난 셈이다. 양 씨 외엔 뚜렷한 혐의점을 가진 용의자가 없었던 만큼 ‘태양다방 종업원 살인사건’은 장기 미제사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일월드컵 개최로 나라가 들썩거렸던 2002년 5월, 피해자 A 씨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유력 용의자였던 양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던 2심 판결문을 중심으로 그날을 재구성해본다.
피해자 A 씨는 대학교 학비를 마련하고자 부산 사상구의 태양다방에서 일했다. 2002년 5월 21일 밤 10시에 퇴근해 곧장 집으로 향한 A 씨는 그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A 씨 언니는 동생을 찾아 나섰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A 씨 언니는 사건 발생 9일 뒤인 5월 30일 경찰에 실종신고를 한다. 이튿날인 5월 31일 마대자루에 담긴 A 씨 시신이 명지동 해안가 안벽에 떠올랐다. 부검 결과 사망 추정 시각은 실종된 다음 날인 5월 22일 새벽 4시께였다.
사건 초기부터 양 씨는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다. 양 씨는 A 씨가 실종된 다음 날인 5월 22일 낮 12시 10분께 사상구의 한 은행을 찾아 A 씨 통장에서 296만 원을 인출했다. 빨간 모자를 쓰고 온 양 씨의 모습은 은행 CCTV에 그대로 잡혔다. 양 씨는 은행 ATM에서 현금 인출을 시도하지만 비밀번호 오류로 두 번 실패한다. 은행 밖을 나갔다가 3분 뒤 돌아와 ATM에서 맞는 비밀번호를 입력해 잔액을 확인한 양 씨는 은행 창구로 가서 낮 12시 18분에 현금을 찾는다.
며칠 뒤 양 씨는 자주 가던 술집을 찾는다. 양 씨는 종업원 B 씨에게 A 씨 신분증과 적금통장을 건네며 은밀한 제안을 한다. 대신 A 씨 적금통장을 해지한 뒤 돈을 찾아오면 일정 부분을 나눠주겠다고 한 것. 공교롭게도 종업원 B 씨는 피해자 A 씨와 외모가 닮았다. 종업원 B 씨는 동료 직원 C 씨와 함께 6월 12일 오후 2시쯤 은행을 향한다. 신분증을 제시해 비밀번호를 바꾸는 수법으로 A 씨 적금통장에서 돈 500만 원을 찾는다.
양 씨와 양 씨를 도와 돈을 찾았던 B, C 씨는 자취를 감춘다. CC(폐쇄회로)TV 영상 기록이 있는 만큼 범인을 비교적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됐다. 하지만 영상은 흐릿했고, 그 이외 단서가 나오지 않으면서 사건은 미제로 남는다. 2015년 8월 형사소송법 개정안 ‘태완이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태양다방 사건의 공소시효도 사라져 부산경찰청 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은 재수사에 들어간다. 양 씨 수배 전단을 뿌리는 등 끈질긴 수사 끝에 경찰은 2017년 8월 양 씨를 검거한다.
양 씨는 사건 초기부터 혐의를 전면 부인한다. 경찰에 검거된 양 씨는 강도 혐의는 인정하지만 A 씨를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양 씨는 A 씨가 실종된 5월 21일 오후 8시 사상역에서 신분증과 통장, 수첩 등이 든 A 씨 가방을 주웠다고 설명했다. 양 씨는 발각되더라도 단순 강도 혐의로 처벌이 미약할 거라 판단하고 통장 비밀번호를 유추해 돈을 찾았다고 말했다.
처음엔 피해자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를 조합해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냈다던 양 씨는 말을 바꿔 피해자가 수첩에 써둔 부모의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를 조합해 통장 비밀번호를 우연히 풀었다고 설명했다. 처음 돈을 뽑고 나서도 아무 일이 없자, 술집 종업원 B 씨에게 A 씨의 적금을 찾아오라는 추가 범행을 제안했다고 답했다.
피해자 통장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태안다방 종업원 살인사건 유력 용의자 양 아무개 씨. 사진=부산경찰청 제공
당시 A 씨 통장의 비밀번호는 ‘6X6X’이었다. 6이 두 번 포함됐다. 하지만 양 씨가 조합했다는 A 씨 부모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엔 숫자 6이 들어있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이를 두고 양 씨가 A 씨를 협박 또는 폭행해 비밀번호를 알아냈다고 추단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부산고법 형사1부와 대법원은 “범죄에서 유죄를 인정하는 데 한 치의 의혹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양 씨가 A 씨의 통장에서 돈을 뽑았다는 이유로 A 씨를 죽였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는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각은 5월 22일 새벽 4시이고, 용의자 양 씨가 돈을 인출한 시각은 같은 날 낮 12시 18분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만약 양 씨가 피해자로부터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냈다면 불과 8시간 만에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두 번이나 틀릴 이유가 없다고 봤다.
의구심은 남는다. 양 씨는 청소년 성매매 알선과 부녀자 강간으로 2003년부터 2012년까지 9년을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2002년 당시에도 양 씨는 성매매 청소년과 함께 동거하고 있었다고 알려졌다. 양 씨와 부산 범괘동에서 함께 살던 당시 19세 동거인 손 아무개 씨는 양 씨를 도와 물컹한 물체가 든 마대자루를 옮긴 기억을 갖고 있다.
그때를 명확히 기억하지 못 하던 손 씨는 최면 수사, 현장 방문 등 경찰 조사를 받으며 당시를 기억해냈다. 손 씨는 양 씨의 부름을 받고 양 씨에게 갔다. 양 씨는 폐창고에서 물컹한 물체가 든 마대자루를 끌고 나왔다. 손 씨는 양 씨를 도와 마대자루를 양 씨의 차 트렁크에 실었다. 손 씨는 양 씨 차를 타고 한참을 간 뒤 그를 도와 차 트렁크에서 마대자루를 꺼냈다. 양 씨는 마대자루를 끌고 어디론가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손 씨는 양 씨가 무서워서 마대자루 안에 든 물체가 뭔지 물어보지 못했다.
피해자 A 씨가 담긴 마대자루로 추정해볼 수 있다. 하지만 양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부산고등법원 형사1부는 손 씨 증언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당시를 기억 못 하던 손 씨가 경찰 조사를 거듭하면서 명확한 진술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손 씨는 “살면서 마대자루를 옮긴 적은 딱 한 번밖에 없다”고 말하면서도 정확히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다. 또 부산고법 형사1부는 양 씨가 굳이 범행이 탄로 날 위험을 무릅쓰고 손 씨의 도움을 받아야 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사건을 수사한 부산경찰청은 아쉬움이 크다. 부산경찰청 미제사건 전담수사팀 관계자는 “증거 인정을 이렇게 엄격하게 하면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점점 어려울 것”이라며 “다른 미제사건의 용의자들이 이번 판결을 보고 무죄로 풀려나는 방법을 터득하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비판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